- 성균관대학교 입시부정의 희생자, 김명호 사건 -

현장에서 미래를 제 116호
이상하

“풀이 처음 싹틀 때에 혼탁한 티끌에 덮히면 마침내 무성하게 자라지 못하고, 사람이 학문을 하는 데 있어서 더러운 시속에 물들면 끝내 공평(公平)하기 어렵다.”(최한기)

최근 재임용탈락 교수의 복직 소송이 뒤따르고 있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원인이 있겠다. 그 중에서도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연세대 시간강사 김이섭 박사 사건과 성균관대 수학과 김명호 교수 사건이다. 이 두 사건은 지식인의 전형적인 내부고발(whistle-blow) 사례에 속한다. 김이섭 박사는 연구비를 둘러싼 교수들의 비리를 고발함으로써 2005년 올해 학교로부터 강의를 배정받지 못했다. 김명호 교수는 1995년 성균관대 수학과 입시 문제의 잘못을 지적함으로써 교수 승진,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했다. 당시 그의 논문 업적에 비추어 아무런 하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재임용 탈락은 내부고발에 대한 일종의 보복인 셈이다.

사회에서 조직과 개인의 관심이 항상 일치할 수 없기 때문에, 내부고발자는 종종 조직의 희생양이 된다. 내부고발자가 보호될 수 없다면, 개인의 가장 현명한 선택은 이기주의적 성향(egocentric tendency)의 행위다. 이러한 이기적 성향은 단순한 심리 차원에서의 이기주의 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그 어떤 도덕적 비난도 함부로 그 성향에 부과할 수 없다. 내부고발자가 희생양으로 끝나는 사회에서 소위 ‘사회적 딜레마’(social dilemma)는 피할 수 없다. 나의 임무를 다할 때 내가 피해를 본다면, 나는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침묵하는 것이 낫다. 이러한 종류의 사회적 딜레마를 피하기 위해 내부고발자의 구제와 사후 보상에 대한 제도적 정비가 여러 나라에서 이뤄지고 있다. 김이섭 박사의 경우 경제적 보상은 받지 못했지만 그나마 2005년 ‘올해의 투명사회기여상’을 받았다. 반면에 김명호 교수의 입시 부정 지적은 그 사안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크게 사회적 주목을 받지 못했다. 아예 어떤 사람들은 지금 그 사건을 되씹으려는 의도에 대해 고개를 흔든다. 벌써 10년이 지난 사건이니 묻어둬야 할까? 아니다. 수학 문제 자격에 대한 대중의 몰이해, 진보와 보수의 대립 속에서 벌어지는 상황론의 오용 그리고 지식인 집단의 무책임성과 중재 능력을 상실한 정부 기관, 이렇게 세 측면이 맞물린 이 사건은 사회의 개선을 원하는 모든 이에게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일이다.

첫째, 1995년 당시 성균관대 수학II 7번 문제는 부분적 오류가 아니라 문제 자체의 자격 요건을 결여한 것임을 분명히 한다. 그 문제에 대한 그 어떤 정당화도 잘못을 은폐하려는 비양심적인 수작에 불과하다.

둘째, 사례 분석이 사회 및 도덕적 위상과 맞물릴 때 상황적 특수성에 의해 악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한 적이 없었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는 식의 논변을 상황론과 연결시키는 것은 상황론의 오용이다. 이러한 오용의 사례는 이념 대립에 불과한 진보와 보수 대결 구도 속에서 김명호 교수 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감춰버린다.

셋째, 그의 내부고발과 다른 직업군의 내부고발 유형을 비교 분석함으로써, 이 땅의 지식인 집단의 무기력함과 사회 갈등의 중재자 역할을 포기한 정부 기관의 무능력함을 지적한다.

1. 수학 문제의 자격 요건

문제 풀기는 수학 학습 및 수학 자체의 내용을 규정한다. 좋은 수학 문제란 무엇인가? 이 주제는 최근 교육인적자원부가 공동연구 양해각서를 체결한 게임이론(game theory) 발상지인 RAND 연구소에서 중요하게 다뤄졌다. 질적 관리보다는 양적 관리에 신경 쓰는 교육인적자원부의 실제 관심사는 아마도 RAND가 꾸준히 개발하고 있는 교육기획예산제도와 인적 교류일 것이다. 매년마다 수능고사를 둘러싸고 말이 많지만 그리고 학생들의 자질 향상을 외치지만, 각 분야에서 좋은 문제와 평가 방식이라는 주제는 국내 상황에 비추어 심도 깊게 장기적으로 연구된 적이 없다. 이러한 사실은 교육인적자원부의 인적 자원 자질에 대한 의구심마저 불러일으킨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좋은 수학 문제의 자격 요건을 따지는 것은 해당 관심사에 따라 달라진다. 수학의 발견 역사에서 중요한 문제는 무엇인가? 힐버트(D. Hilbert)는 그 유명한 1900년 파리 강연회에서 이 주제를 다뤘다. 여기서 관심사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수학 문제들이다. 학생 집단의 지적 배경과 나이 등과 연관해 좋은 문제의 성격 규명 주제가 논의된다. 입시 문제의 경우 사지선다형의 문제와 주관식 문제가 있다. 전자는 전공 수행 능력을 평가하는 동시에 수학을 타 분야와 맞물려 현실세계에 적용하는 능력을 평가한다. 국내 입시에서 후자를 평가하는 수학 문제는 지극히 드물다. 주관식 수학 문제는 이공계 지원자에 주로 해당한다. 1995년 사건의 발단이 된 문제는 주관식이었기 때문에, 논의를 주관식 문제 유형에 국한하자. 주관식 수학 문제의 대표적 유형은 “P라면 Q다”의 조건문 형태로 주어진다. P는 문제 성립을 위한 조건들을 함축하며, Q에 직접적인 질문이 들어간다. 주관식 문제 유형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출제자의 의도와 연관된다. 출제자의 의도는 여러 맥락으로 분할된다. 해당 문제와 연관된 수학이론의 이해력 검증, 증명 능력 검증, 기호 사용 능력 검증, 새로운 발견 능력 검증 및 복합적 사고 능력 검증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출제자의 의도와 함께 주관식 문제 유형은 크게 ‘폐쇄형’과 ‘개방형’으로 분류된다.

폐쇄형: 문제의 성립 조건을 서술하는 P가 특정 수학 이론의 구체적인 사례 혹은 모델로 존재하는 경우, 질문 Q는 P에서 도출 가능한 결론 혹은 P가 성립하기 위한 부가 조건을 묻는다.

개방형: P가 현재 이론에서 도출되지 않았지만 생각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을 함축하는 경우, P에서 나올 결론 혹은 P에 부과될 수 있는 조건을 묻는다.

이 글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이 두 유형에 대한 실제 사례 분석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RAND 등 유명 연구소의 연구주제인 좋은 수학 문제를 규정하기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출제자의 의도가 명확히 학생에게 전달될 수 있어야 한다. 또 의도의 맥락에 비추어 증명 능력 검증은 개방형 문제 유형과 어울리기가 상대적으로 어렵다. 복합적 사고 능력을 검증하려는 경우 자칫 잘못하면 중복답안이 나올 수 있다. 문제의 부분적 오류는 대게 좋은 문제를 만들려는 과정의 산물이기 때문에, 오류를 가지고 무조건 출제자를 비난할 수 없다. 심지어 좋은 문제를 만들어 보겠다는 선의의 욕심 때문에, 문제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실수도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1995년 당시 수학II의 7번 문제는 좋은 문제를 만들려는 과정에서 발생한 실수로 보기 힘들다. 그것은 어처구니없는 실수이며, 7번 문제는 문제 자체로서 성립할 수 없다. 이제 논의에서 중요한 주관식 수학 문제의 자격 요건을 따져보자. 여러 가능성이 있지만, 입시 문제의 대다수가 폐쇄형 유형임을 고려하자. 폐쇄형 문제 유형에 국한해 다음에 해당하는 문제는 수학 문제로서 자격 요건을 갖출 수 없다.

전제 P는 거짓이다. 거짓이라는 사실은 해당 이론 틀 속에서 P가 함축한 모델이 존재할 수 없거나 P의 조건들이 모순을 발생시키는 경우다. 이러한 경우 이 P에서 도출되는 결론 혹은 P가 성립하기 위한 부가 조건을 물을 수 없다.

왜 그런지 실제 당시의 문제를 가지고 분석하자.

7) 영 벡터가 아닌 세 공간벡터 a, b, c가 모든 실수 x, y, z에 대하여 |xa+yb+cz|≥|xa|+|yb|를 만족할 때 세 벡터가 서로 직교함을 증명하라. (15점)

이 문제는 주어진 조건에서 도출 가능한 결론을 증명하라고 요구한다. 곧 이해력과 증명 능력을 평가하는 폐쇄형 문제 유형에 해당한다. 문제의 조건에서 실수 와 에 각각 1을 그리고 에 0을 대입하자. 이 경우 어이없는 결론을 얻는다.

두 공간벡터의 평행사변형 합은 각 벡터의 크기 합보다 크거나 같다는 뜻이다. 유클리드 기하학적으로 말하면, 주어진 삼각형에서 대변의 길이가 각 두 변의 길이합보다 크거나 같다는 것인데, 이런 경우는 있을 수 없다.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에 문제의 전제는 거짓이다. 형식 논리학의 조건문 "P라면 Q다"의 진리치를 결정하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조건문이 참이라면, 전제(P)가 참이면서 결론(Q)이 거짓일 수 없다는 해석이다. 참과 거짓만 허락하는 2치 형식논리학에서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조건문은 항상 참이다. 따라서 전제가 거짓일 때 결론의 참 거짓 유무와 상관없이 조건문은 항상 참이 된다. 위 문제의 경우 전제 자체가 거짓이므로, “이상하는 성균관대 교수다”라는 거짓 진술도 답이 된다. 마찬가지로 “7)번 문제의 전제가 거짓이므로, 이상하는 계약직 떠돌이일 뿐이다”라는 진술도 답이 된다. 2치 형식논리 차원에서 당시 성대 7번 문제는 수학 문제로서 자격 상실이다. 게다가 위에서 언급한 조건문의 해석은 논리학자들 사이에서도 여지가 많으며, 논리학의 체계는 하나가 아니다.

진화심리학(evolutionary psychology)에서 조건문에 대한 인간의 판단은 2치 형식논리의 해석 방식에 둔감하다는 사실이 실험적으로 밝혀졌다. 그 유명한 웨이슨 선택 실험(Wason selection test)은 조건문에 대한 실제 인간의 판단이 경험 및 사회 맥락과 무관하게 작용하지 않음을 보여준다.(Cosmides and Tooby) 조건문 유형 문제의 직관적인 의미는 이렇다. 전제가 특정 이론에 근거해 참으로 성립하거나 혹은 참일 가능성이 있을 때만 질문항인 결론이 의미가 있다. 당시 수학II 7번 문제는 아예 전제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전제에 근거해 어떤 질문을 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물론 현재 서울대 재직 중인 당시 출제자 이우영 교수가 고의로 자격을 갖추지 못한 문제를 내려고 한 것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속담이 있듯이, 전문가도 자신의 해당 분야에서 터무니없는 실수를 한다. 하지만 실수는 용납될 수 있어도, 실수를 은폐하는 더러운 방법은 아니다. 당시 출제위원 이우영과 채영도 교수가 진학지에 발표한 모범답안은 후세에 남아 길이길이 욕을 얻어먹어야 할 가증스런 작품이다. 그들의 모범답안은 7번 문제 자체가 참인 명제임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전제가 거짓이므로 결론의 참 거짓 유무와 상관없이 문제 자체가 참인 명제라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만약 그들의 의도가 그랬다면 문제는 이래야 마땅하다.

7) 영 벡터가 아닌 세 공간벡터 a, b, c가 모든 실수 x, y, z에 대하여 |xa+yb+cz|≥|xa|+|yb|를 만족할 때 세 벡터는 서로 직교한다. 이 조건문 형태의 복합 명제 전체가 참임을 보여라. (15점)

과연 이우영 교수의 원래 출제 의도가 이 문제였고, 실제 문제는 이 문제의 부분적 오류였을까? 이렇게 볼 단서는 아무 데도 없다. 또 그랬다고 하더라도 실제 7번 문제는 여전히 문제 자격을 갖출 수 없다.

이우영과 채영도 교수는 학생들을 상대로 출제자의 숨은 의도를 파악해보라는 심리 테스트를 하려고 했단 말인가? 심리 테스트가 수학 문제로서 자질이 있다고 주장할 수학자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없다.

왜 당시 학생들은 크게 반발하지 않았을까?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7번 문제가 수학II의 마지막 문제였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만약 이 문제가 첫 문제였다면, 상황은 꽤 달라졌을지 모른다. 또 지금처럼 인터넷에 의한 정보 공유와 교환이 그 당시 자유로웠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이우영 교수 및 해당 관련자들은 잘못을 시인하기 보다는 재임용 심사에서 김명호 교수를 탈락시켰다. 그의 인성에 하자가 있다는 것이다.

교수 재임용에서 인성을 문제 삼을 수 있는 기준이 있을까?

실제 성추행 및 범법 행위를 한 자들도 버젓이 재임용된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내 눈에 인성을 걸고 넘어가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다. 또 술자리도 아니고 공개적인 심사기록에 객관적 평가가 불가능한 인성을 운운했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다. 김명호 교수는 학교 입시부정, 곧 해당 당사자들의 잘못 은폐에서 기인한 부정을 내부고발한 죄 아닌 죄로 보복을 받은 것이다.
1996년 전국 44개 대학 189명의 수학과 교수들국외 저명 수학자들의 탄원서가 뒤따랐지만, 당시 교육부는 무관심으로 일관했고 김명호 교수는 끝내 구제될 수 없었다. 서울대 김민수 미학과 교수가 법적 투쟁에 의해 올해 복직에 성공하자, 김명호 교수도 당시 사건에 대해 다시 이의를 제기했다. 이 이의 제기에 대해 일부는 지나간 사건을 왜 건드리는지 의아해 하며, 또 일부는 당시의 학교 상황에서 대세론을 민주주의와 연관시켜 옹호하기도 한다. 이 태도가 얼마나 졸렬하고 파렴치한지 따질 차례다.


2. 상황론의 오용

상황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 집단 혹은 사물이 처한 방식이다. 상황을 고려한 판단은 인간의 가장 일상적인 판단 유형이다. 그가 처한 상황적 특수성을 고려하라. 그 당시 집단이 처한 상황적 특수성을 고려하라. 이러한 준칙이 상황을 고려한 판단에 개입한다. 인간의 원초적인 판단 유형으로서 상황적 판단 자체가 상황론을 대표하는가? 그래서 궤변과 기득권의 논리를 상황적 특수성에 근거해 정당화하는 것이 상황론인가? 우리 사회의 많은 담론은 이러한 질문에 긍정하도록 상황론을 몰고 간다. 하지만 상황을 고려한 판단 자체가 상황론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판단이 사회 및 도덕적 문제와 맞물릴 때 상황론은 자신 혹은 자신이 속한 집단을 방어하는 무기가 아니다.

그런 무기로서 용어 ‘상황론’을 사용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지는 다음과 같은 주장 속에 반영된다. “유태인 학살을 독일인 다수가 동조했기 때문에 상황론은 이 사회의 적이다.” “그 사람의 친일 행적은 그 당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성균관대 수학과 교수들은 학교의 이익을 위해 틀린 문제를 은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모든 주장은 궤변일 뿐 결코 상황론에 호소할 성격을 갖지 않는다.

독재 시절을 거친 후 현재의 진보 대 보수의 대립 구도는 종종 선과 악의 대립 구도로 일부에 의해 묘사되기도 한다. 이 와중에서 최대의 희생양이 상황론이다. 대다수 진보 세력은 이념을 지향하고, 적들은 자신이 처한 처지를 이용해 비판을 피해나간다. 이념을 지향하는 것은 당연하고 정당하다. 문제는 보편적으로 가정된 이념이 하나가 아니라는 데 있다. 생명권을 보편적인 것으로 가정한다면, 낙태는 허용될 수 없다. 반면에 건강권을 포함한 여성권을 보편적인 것으로 가정한다면, 생명권을 앞세우는 집단과 여성권을 앞세우는 집단 사이의 의견 조정은 힘들다. 사례, 곧 유사한 상황들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상황의 분석에 근거해 집단적 의사결정(collective decision making)을 지향하는 것은 실천윤리의 큰 흐름이다. 현대 상황론이 있다면 이러한 실천윤리의 흐름을 타는 담론 혹은 이론이다. 상황론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동양에서 인화(人和)를 강조하는 것도 하나의 실례가 된다. 비록 그것이 과거 정치세력의 이념일지라도 소수 권력집단의 이득을 위해 사용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인화를 위해 여러 관습이 개발되고 정착한다. 그러한 관습은 특정 상황에서는 당연하게 보이지만 안 그런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우 도덕적 이상형인 성인(聖人)의 품행에 호소한다. 이것이 권위의 호소에 의한 오류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상황을 고려한 판단은 개연적(probable)인 경우가 많다. 성인을 끌고 들어가는 것은 나름대로 그러한 불확실한 판단에 도덕적 위상을 부여하려는 노력이다. 정보의 부족에 의한 명백한 상황적 판단이 불가능할 때 현자의 품행과 의견을 중시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의 상황론 그리고 헬레니즘 시대에도 나타난다. 로마 시대에 이르러 현자의 권위는 공익으로 대체된다. 길거리 현자로 유명한 디오게네스(Diogenes)와 안티파터(Antipater)의 논쟁을 살펴보자.

집을 팔려는 정직한 사람은 겉과 달리 그 집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야만 하는가? 안티파터는 그래야 한다고 답한다. 디오게네스는 그럴 필요는 없다고 한다. 집 주인은 그 집이 완벽하다고 주장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가 집의 흠집을 알릴 필연적 의무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의 상황을 놓고 디오게네스와 안티파터의 의견이 갈렸다. 하지만 둘 다 양심적 행위를 지향한다. 디오게네스가 비양심적 행위를 옹호하기 위해 위 주장을 펼친 것은 아니다. 여기에 대한 로마 집정관 키케로(Cicero)의 평가는 어떠한가? 키케로는 안티파터의 편을 든다. 상황적 판단이 도덕적 함의를 가지려면, 그것은 진정한 이득, 곧 공익을 지향해야 한다. 키케로의 결론은 이렇다. 집 주인의 침묵은 공익에 위반하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도덕적으로는 잘못된 것이다.

로마 시대 상황론 정신은 중세 결의론(casuistry)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실천윤리에서 사례연구를 중시하는 상황론 정신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갖는다. 내가 이러이러한 처지에서 그랬던 것이니 이해해 달라. 이런 주장은 상황을 핑계 수단으로 삼는 것일 뿐이다. 그런 주장을 담론 혹은 이론으로서 상황론과 결부시킬 역사적 뿌리는 없다. 일부 세력이 상황을 핑계 삼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것은 상황론의 역사적 맥락에서 허락될 수 없으며, 그 세력을 상황론의 추종자로 몰아세워 비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신문에 나오는 ‘상황론’은 우리의 시대상황이 빚어낸 ‘상황론의 오용’이다. 그것이 우리만의 고유한 발명품이라면, 먼저 어떤 시대적 맥락에서 그러한 상황론의 특이한 사용법이 발생했는지 따져야 할 것이다.
이 시대 상황론의 오용은 김명호 교수의 양심을 퇴색시킨다. 일제 강정기의 친일파 행적, 연구비를 둘러싼 교수의 비리 등은 상식을 가진 모든 이에게 그 어떤 경우에도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없는 일로 비춰진다. 아들이 아버지가 친일파라는 사실을 아버지의 처지에 비추어 이해할 수는 있지만, 아버지의 친일파 행적은 공적인 차원에서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이러한 인지상정에 근거한 인간적 이해와 도덕적 정당화의 상식적 구분은 유독 김명호 교수 사건에 대해서는 아니다. 수학 문제의 성격에 대한 대중의 몰이해가 그 하나의 원인이며, 또 소규모 인원에 해당하는 입시 문제의 성격이 다수의 공감대를 유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심지어 상황론의 오용을 보여주는 다음 논조에 귀를 기울이는 경향이 있다.

김 교수님, 어차피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학교를 위해서 눈 감자는 것입니다. 결코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다수가 이번 사건을 적당히 넘어가기로 했으면, 대세를 따르는 것이 민주주의 아닙니까.

이러한 논조에서 발견되는 민주주의에 대한 터무니없는 관점은 논외로 한다. 상황론의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해당 당사자 혹은 집단의 사회적 성격 규명이다. 만약 성균관대가 이 세상 전체라면 위의 논조는 받아들일 만하다. 하지만 대학은 사회 전체 체계의 부분일 뿐이고, 다수가 바라는 혹은 암묵적으로 합의된 본연의 대학 기능이 있다. 교수 직위에는 사회에서 대학의 올바른 기능에 대한 책무가 부여되어 있다. 이 책무를 회피한다면, 교수 자격에 필요한 최소한의 양심을 결여한 것이다. 대학교가 그런 양심을 보호할 수 없다면 더 이상 대학이 아니다. 그것은 이득 산출을 위한 조직폭력배 집단과 유사한 것이다. 성균관대 수학과를 위해 개인의 양심을 은폐시키려는 논변은 대학이 기능하는 사회의 공익과 맞물릴 수 없다. 그것은 공익의 적, 곧 ‘공공의 적’이다.

상황론의 많은 판단이 개연적인 이유는 양심적 행동을 보호하려는 동기에서 기인한다. 양심적 행위가 반드시 필연적으로 좋은 결과를 산출하는 것도 아니며, 어떤 경우에는 공익을 위해 ‘양심적인 거짓말’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상황론의 역사적 맥락에서 비양심적 행위를 도덕적으로 허락하는 이론과 담론은 존재한 적이 없다. 공익이 아니라 특수 집단 이득을 위해 양심을 은폐하는 것은 악이다. 상황론에서 허락되는 양심적 거짓말의 역사적 사례는 갈릴레이 종교재판일 것이다. 이 재판이 얼마나 특수한 재판인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이단 심문이 걸린 갈릴레이 종교재판에는 아무런 신체적 박해나 고문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보의 공유와 교육의 평등이 보장되지 않은 당시에, 유럽의 절대 다수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다. 천동설인지 지동설인지 그리고 지구가 자전하는지 안 하는지는 다수의 관심사 밖의 일이다. 당시 종교는 사람들의 생활을 지배했던 세계관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갈릴레이의 발견이 대중에게 빠르게 전파된다고 생각해보라. 교회세력의 안전도 문제지만 대중의 집단 결속력이 붕괴됨으로써 큰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 교황은 단순히 종교교리와 교회세력 유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포함한 사회 전체의 결속력 유지를 위해 갈릴레이를 종교재판에 회부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가능성이 고문 없는 특수한 이단 심문의 성격을 규명해줄 단서일지 모른다. 갈릴레이 종교재판은 자신들의 변호를 위해서 양심을 은폐한 자들의 짓거리와는 차원이 다르다.

상황론이 김 교수 사건에 제대로 적용되려면, 사건은 이렇게 진행되어야 했다. 출제자 이우영 교수는 학교의 강압과 양심 사이에 고민을 하다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공표했다. 학교 측은 이우영 교수를 재임용에서 탈락시켰다. 이런 경우에 상황론은 양심을 지킨 이우영 교수의 구제 논변으로 등장할 수 있다. 만약 그 당시 이우영 교수가 잘못된 문제에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면, 그는 철면피다. 나는 지금이라도 이우영 교수가 당시 사건에 대해 양심선언을 하기를 바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우리 시민은 지식인들의 생각보다 현명하고 상식적이다. 그가 양심선언을 한다면 그 누구도 그를 손가락질 하지 않을 것이며, 그는 오히려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김명호 교수 사건의 사회적 중요성을 살펴보자.


3. 지식인, 자율성, 학풍 그리고 내부고발

연세대 김이섭 박사, 서울대 김민수 교수 그리고 성균관대 김명호 교수 사건을 관통하는 공통점은 대학사회에서 지식인의 내부고발이라는 점이다. 이에 대한 보복의 부도덕성은 종종 대학 사회의 자율성이라는 문구아래 흐려진다. 사건이 현재의 중요 사안과 맞물리지 않은 경우, 사건에 대한 언급은 어떤 사람에게는 짜증나는 일로 비춰진다. 그 사람이 해당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면, 그는 해당 집단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 자체에 대해 혐오감을 드러낸다. 혐오감은 전체 집단을 매도하지 말라는 식으로 표출된다. 불행히도 김명호 교수 사건은 국내외 저명 수학자들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다른 내부고발 사건에 비해 세속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당시 김 교수의 재임용 탈락은 대학의 자율적인 의사결정에 의해 이뤄졌다는 주장 한 마디가 대중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오기도 한다. 왜 그런 주장이 설득력을 갖출 수 없는지 논증한다.

조직과 개인의 관심사가 항상 일치할 수 없다. 이것은 생활세계의 현실이다. 조직이 공익에 반하는 성향을 띨 때 내부고발은 조직의 목적과 사회의 공익 사이에서 벌어진 양심적 갈등의 표출이다. 내부고발은 조직의 직업적 특성에 따라 그 유형 구분이 가능하다. 모든 직업이 걸어온 역사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공학자의 내부고발과 대학 교원의 내부고발은 다르다. 두 직업군의 내부고발이 본질적 차이를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내부고발을 접근하는 방식은 직업별 특성과 무관할 수 없다. 직업으로서 공학은 도구의 디자인과 사용에서 책임(responsibility), 안전(safety) 그리고 능숙함(skill)이라는 의무를 공학자에게 부과한다. 대학 교원에게 요구되는 의무는 효과적인 수업(teaching), 연구(research) 그리고 사회적 봉사(social service)다. 이러한 직업별 의무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직업의 역사와 연관된다. 따라서 공학자과 대학 교원에게 요구되는 의무는 미래가 아닌 현재 시점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현재 시점에서 공학자의 의무가 실현되는 방식과 대학 교원의 의무가 실현되는 방식은 다르다. 공학자는 아직까지 일반적으로 직접 사람을 상대하지 않는다. 조직, 주로 생산조직체계의 목적 달성이 공학자의 어께에 부과되는 만큼, 목적이 공익에 반하지 않는다면 공학자에 대해서는 충성(loyalty)이 요구된다. 실제 생산조직체계의 많은 행동 준칙은 조직에 대한 충성과 연관된다. 직업으로서 공학과 달리 대학 교원은 주로 직접 사람을 상대한다. 대학 교원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봉사는 단순한 조직의 순기능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의 공익과 개선을 위한 학자적 양심 발휘를 포함한다. 그래서 대학 교원과 대학의 부분 조직에 대해서는 공학자와 달리 자율권이라는 것이 주어져 있다. 조직 내 활동에서 자율권이 상대적으로 제한된 공학자가 내부고발을 하는 경우 조직 자체에 의해 보호받을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조직 구성원의 현명한 선택은 침묵이다. 의무를 다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대세에 순응하는 것이 효과적인 전략이 된다. 결과는 상대적으로 힘없는 사회 구성원들은 이기적 성향을 갖게 된다. 개인의 이러한 이기적 성향은 사회의 체계적 문제에서 기인했기 때문에 무조건 개인을 탓할 수 없다. 따라서 조금 냉소적으로 표현한다면, 우리가 그토록 부러워하고 추앙하는 선진국은 내부고발자에 대한 효과적인 보호 정책과 제도를 꾸준히 개발한다.

조직 내 활동에서 자율권을 보장받는 대학 교원 사회의 내부고발에 대해서도 선진국은 보호 정책과 제도를 꾸준히 개발하고 있는가?

답은 아니다. 이유는 간단하다.
김명호 교수 사건과 같은 일은 거의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학 사회에 자율권이 보장된 만큼 틀린 수학 문제의 지적은 자체적으로 해결된다. 대학 교원에 부과된 사회적 봉사라는 의무에 비추어 공익에 반하는 잘못의 은폐는 자체적 해결이 아니라 책임 회피 음모의 일종이다.

여기서 내부고발과 함께 ‘사회의 긍정도’를 짚고 넘어가는 것이 이후의 논증에 효과적이다.

긍정적 사회일수록 조직 내 활동에서 자율권이 제한된 직업군의 내부고발에 대한 공적 담론화 빈도수가 자율권이 보장된 직업군의 그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많아야 한다.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반대다. 공학자의 내부고발은 아예 신문기사에 나기 힘든 현실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전문직으로 대우받아야 할 공학자 집단이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현실을 암시하고, 또 한편으로는 내부고발자로서 공학자를 보호할 효과적인 사회적 장치가 없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공계 육성은 정부가 나서서 외쳐보았자 실제 현실화되기 힘들다. 대학 교원에 의한 내부고발은 특이할 정도로 많으며, 복직 소송이 쌓여있는 상태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우리 대학 사회가 정상 기능을 하지 못함을 보여주고, 또 한편으로는 현대 사회에서 갈등의 중재역할을 해야 할 정부 기관의 무능력함을 보여준다. 대학 사회의 교원 및 조직의 진정한 자율권은 사회의 공익이 아니라 해당 대학의 단기적 관심사에 질식한 상태다. 본연의 자율권이 대학 조직의 은폐 조작의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남용된 사례가 많으며, 김명호 교수 사건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첫째, 현재 대학 사회의 전통은 우리 고유의 것이 아니다. 내가 언급한 대학 교원의 세 의무는 사실 대학의 ‘신성한 삼위일체’(holy trinity)로서 유럽 전통에서 기인한 것이다. 17세기 과학혁명기 이후 다른 문명권의 침입에서 자유로웠던 유럽은 대학을 중심으로 꾸준히 자생적인 학풍을 유지하고 개발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연속적인 학풍의 전통 속에서 귀족 정신만큼이나 학자적 양심이 강조되었고, 이 와중에서 대학 사회의 자율권이 보장된 것이다. 그만큼 유럽 대학의 교원들은 자신의 일에 책임을 질 줄 안다. 책임질 줄 아는 대학 교원에 대비될 수 있는 우리의 전통은 두 말할 필요 없이 선비정신이다. 하지만 선비정신은 조선의 관료체제 속에서 기능한 것이지 유럽의 대학 사회와 같은 곳에서 기능한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서원을 중심으로 학풍은 있었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학풍은 자체 이론의 완성뿐만 아니라 양심에 따른 행위를 중요시한다. 19세기에 이르러 우리 이론으로 무장해보려는 학풍 운동이 일어났다. 내가 글을 시작할 때 최한기를 인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한기 사상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최한기가 우리만의 학풍을 원했던 상징적 인물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불행히도 일제 강정기를 거치면서 우리의 학풍 정신은 끊어졌다. 이러한 측면에서도 일제 강정기의 폐단은 재조명되어야 한다.

둘째, 해방이후 6.25사변을 거치면서 경제개발을 위한 인적 자원의 제공 장소로서 대학이 기능해왔다. 이 점에서는 우리 대학의 역사는 분명히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학풍 부재 속에서 독재와 결탁한 경제개발 논리는 우리에게 맞는 제대로 된 대학 사회의 정착을 가로막았다. 학생들과 정직한 교수들이 반독재 투쟁에 나설 때 대학의 재단과 경영진은 독재자의 편이었다. 서로 주고받는 이득의 관계 속에서 지식인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는 무리들이 정권과 결탁했다. 정격유착만큼이나 고질적인 ‘정교(政敎)유착’이 관행화되었고, 대학의 조직 구성은 유례없는 수직상하 명령체계(organogram)를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대학의 조직 체계 속에서 집단적 합의는 불가능하고, 말을 안 듣는 자들, 실제는 사회의 공익을 위해 저항한 분들에 대한 보복이 이뤄졌다. 김명호 교수를 비롯한 많은 해직 교수의 복직 소송은 이러한 차원에서 재음미되어야 한다. 대학 교원이 정권에 들어가는 가장 빠른 길은 여전히 대학 총장이 되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정부의 인적 자원 활용이 정비되지 않은 상황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셋째, 정부 기관의 무능력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선진국과 경제 경쟁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한민국의 정책은 이제 과거의 양적 중심 관리체제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2부 리그에서 1부 프로 리그로 올라온 팀이며, 이제부터 진짜 게임의 시작인 것이다. 게임의 선결 조건은 우승이 아니라 다시 2부 리그로 내려가지 않는 것이다. 이를 위해 경제 성장 등 양적 중심의 관리뿐만 아니라 중재자로서 정부 기관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잘못된 혹은 사전에 시민의 의사를 무시한 정책이 빚어낸 갈등의 결과가 얼마나 심각한지 그리고 이에 의해 소모되는 간접비용이 얼마나 큰지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상황을 고려하는 인간의 합리성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정부는 과거와 달리 갈등의 중재자 역할을 하려고 하지만 아직까지 그 노하우(know-how)측면에서는 부족하다. 대표적 실례는 건설 전에 환경조사를 명문화한 것은 현명했지만, 환경조사를 건설부와 환경부 소속으로 이원화한 것은 현실적으로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원화된 정부 기관 소속 환경조사가 효과적인 결과를 가져왔는지, 다른 나라의 사례를 살펴볼 것을 충언한다. 어쨌거나 고질적인 정경유착보다 정교유착이 더 심했던 것일까? 유독 대학 사회의 갈등에 대해서는 교육인적자원부와 정부는 회피한다.

김명호 교수는 재임용 개정법에 따라 ‘재임용거부처분취소권’을 청구했다. 그러나 교육인적자원부는 그 취소권을 각하시켰다. 행정심판법 제39조 ‘재심판청구의 금지’와 민사소송법 제451조 ‘재심사유에 판례변경 불포함’ 조항을 들어 더 이상 다룰 수 없는 확정된 사안이라는 것이다. 실제 이유는 사건을 중재할 의도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민사소송에는 공소시효가 없을뿐더러, 행정심판법 제39조와 민사소송법 제451조는 재임용 개정법 이전의 것이다. 올해 2005년 1월 25일 발효된 재임용 개정법이 소급적용 불가능하다는 법적 근거는 각하 결정에서 빠져있다.

교육인적자원부가 대학 사회 개선을 위한다면, 먼저 양적 관리에 근거한 투명화 작업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교육인적자원부가 굳이 대학 행정에 일일이 간섭할 필요도 없다. 중재자로서 정부 기관이 복직 문제 등 대학 사회의 갈등 현안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비로소 경제규모에 부합하는 대학 사회의 정착이 가능하다. 이러한 대학의 질적 개선을 뒤로한다면, 교육인적자원부가 RAND와 맺은 연구 양해각서는 쇼비니즘 사업으로 끝날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RAND의 주관심사는 결코 교육기획예산정책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그것만큼이나 좋은 수학 문제의 자격 요건도 중요한 연구주제로 다뤄지고 있다. RAND의 정책 담당관이 수학 문제를 둘러싼 김명호 교수 사건과 교육인적자원부 대처를 안다면 속으로 뭐라고 말할지 궁금하다.

김명호 교수 사건은 매년 마다 신문에 보도되는 입시 문제의 자질과 함께 다시 고려되어야 한다. 좋은 문제 그리고 문제의 자격 요건에 관한 진지한 연구와 고민은 없는 채 유사한 유형의 문제가 계속 반복된다. 이러한 반복은 결국 사교육 기관에 정보를 늘려줌으로써 공교육을 갉아먹는다. 김명호 교수의 내부고발 사건은 또한 진보와 보수의 대립 속에서 벌어지는 상황론의 오용, 대학 집단의 무책임성 그리고 정부 기관의 중재 능력 상실과 함께 재평가 받아야 마땅하다. 정부 기관이 중재 능력이 없다면, 수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다시 한 번 1996년처럼 수학과 교수들의 서명운동은 불가능한 것인가? 김명호 교수는 어쩌면 이 순간 대학 비리를 놓고 당시 해당 당사자들과 함께 국회 청문회에 서는 날을 상상할지 모른다. 이렇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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