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사회] 기사시각 : 1998/03/16 10:25
(2)사립대 족벌체제/친인척 판치는`가족회사'

사학재단들이 가족이나 친인척들을 핵심보직교수로 앉히는 등 족벌체제 구축.유지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어 족벌체제가 교수채용 비리 등 각종 대학비리의 온상 노릇을 하고 있다.

족벌체제를 구축한 많은 사립대학에서는 금품수수에 의한 교수채용, 입학 비리, 공금횡령 등 갖가지 비리가 극성을 부리고 있으며 이런 문제가 생기더라도 대개 외부로 번져 확산되지 않고 속으로만 곪아가고 있다.

경북 경산에 있는 경산대(총장 변정환)의 경우 총장의 아들.딸은 말할 것도 없고 조카와 조카사위 등에 이르기까지 친인척들이 학교의 주요 보직과 교수직을 독차지하면서 각종 잡음이 불거져 나오고 있다. 88년에 한의학과 전임강사로 임용된 변 총장의 장녀(36)는 지난 96년 학생들의 수업거부로 강의를 하지 못하다가 최근 조교수로 전격 승진해 반발을 샀다. 또 맏아들(35)은 지난해 3월 슬그머니 교수로 임용된 지 한달만에 미국에 교환교수로 건너갔고, 차남(33)은 95년께 전임강사임에도 부교수 이상 가능한 보직인 홍보실장직을 부여받아 특혜라는 지적을 받았다. 학교의 한 관계자는 "대학이 사유화되고 족벌체제로 전락하면서 교수뿐 아니라 직원이나 대학원생 선발때도 금품이 오가는 것이 관행화됐다"고 말했다.

경기도 화성군 수원대는 이종욱(77) 총장의 아들이 학교 재단이사장을, 며느리 최아무개(46)씨는 현직 교수이면서 지금은 재단에서 분리된 노인휴양시설 (주)라비돌의 감사로 재직하는 등 이 총장의 직계 가족이 학교 운영에 핵심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수원대 총학생회쪽과 전직 교수들은 이 총장의 조카사위와 친구 등 총장의 직계 가족과 관계된 교수만도 10여명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또 광주여대.대불대.전남전문대는 각각 이사장의 아들이 교수로 재직하고 있고 동신전문대 또한 95년 '학부 때 성적이 좋지 않은' 학장 아들을 광고홍보과 전임강사로 채용해 공정성 시비를 사고 있다.

특히 광주예술대 설립자 이홍하(59.서남대 총장)씨는 가족과 친인척을 내세운 이른바 '족벌경영체제'를 구축해 산하 3개 고교와 4개 대학.전문대의 등록금.국고보조금 등을 한손에 넣고 주물렀다. 자신의 부인.동생.매제.조카와 산하 고교 측근 교사들을 총장.이사장.이사로 임명하고 교수나 교직원으로 채용해, 재정과 학사운영 등을 장악했다.

이런 족벌체제로 전문대였던 광주예술대에서만 95년 이후 60억원대의 등록금을 횡령한 것을 비롯해 모두 400억여원을 횡령했고, 결국 97년 5월 이 총장이 광주지검에 구속됐다.

광주시에 있는 동신전문대도 이사장의 친인척들이 사실상 돈을 움직이는 부서에 배치돼 있다. 처남.조카, 아들의 동서 등이 법인 총무과장이나 산하 고교 서무과장 등으로 포진해 있으며, 아들은 동신대 총장이고, 며느리와 동생은 전문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이를 바탕으로 이사장은 91~93년 동강.후성학원 법인 수익금 2억5천만원을 횡령했다.

족벌체제와 함께 교수의 연구비 전용도 대학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로 꼽히고 있다. 숭실대 폐기물자원화연구센터 소장인 도갑수(54.화공학) 교수는 지난 7일 정부기관으로부터 지원받은 연구사업비 3억여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됐다.

도 교수의 사례는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대학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다.

이들은 정부기관이나 기업체 등이 발주한 연구프로젝트 예산을 교수가 착복하는 것은 특히 공대나 자연대 등 이공계 대학에서는 이미 '관행'처럼 돼버렸다고 밝혔다.

수원 광주 전주 대구/홍용덕 이수범 임석규 홍대선 기자



  • 사학비리는, '교육계의 에이즈 바이러스' 대법원의 위법한 법률해석 범죄행위에 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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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천4백억 횡령 '사학 대도(大盜)' 이홍하, 어떻게 풀려났지?

    국민세금의 연구비 거저 처먹는 서울대 출신이 지배하는 3위일체 법조 범죄단(=법원+검찰+헌재)의
    전폭적 지원없이는 불가능한 '의도적인 법 위반'으로 '입시 부정' 등 '사회정의 죽이기'

    '부러진 화살' 영화에서 역할: 문성근(김용호, 신태길 합친 역), 이경영(중간에 사표쓴 이회기), 박원상(박훈), 김지호(서형, 연합뉴스 장재은), 김응수(박홍우), 박수일(검사: 백재명, 신동국,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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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담: 강제징용 관련 위법논리 개발 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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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일영, 김시철의 원세훈 무죄 공모, 김소영의 최민호 비호


  • [ 특집 ] 2001년05월15일 제359호

    “돈벌려면 학교를 세워라”

    어느 사학관계자의 생생한 고백…족벌들이 자자손손 말아먹는 이 엄청난 현실!

    사진/ 크고 작은 사학분규의 배경에는 족벌세습을 보장하는 낡은 제도가 버티고 있다. 사진은 학생들에게 점거된 덕성여대 총장실 주변.(강창광 기자)

    설립자의 처는 이사장, 딸은 학장, 이사장의 오빠는 이사, 이사장의 동생은 매점경영, 아들은 학교건물 공사업자 선정 담당, 외사촌은 서무과장, 학장의 남편은 기자재업자 선정 담당, 학장의 남편 제자들은 경리담당과 시설담당…. 사학의 족벌경영 실태를 한눈에 보여주는 사례이다.

    국회의원 이사장, 오히려 호통치다

    지난 3월 초 사립학교법 개정문제로 국회가 한창 시끄러울 때 한 독자가 이메일을 보내왔다. “저는 30년간 전문경영인으로 일하다 퇴직 뒤 수도권에 소재한 한 사학재단의 사무국장 겸 전문대학 사무처장으로 일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편지는 조목조목 재단의 비리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는 96년 9월부터 97년 3월까지 6개월간 이 학교에서 일하다, 더이상 공범자가 되기 싫어 사표를 썼다고 한다.

    앞서 말한 족벌경영과 함께 이 대학은 전국 전문대학 150개교 평가결과 최하위인 D급을 받았지만 학생을 200명 증원하고 수억원의 국고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사무처장이던 이씨는 이사장이 교육부 실무과장에게 전화 걸어 호통치는 모습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이사장은 당시 15대 국회의원이었다. 이씨는 “왜 너나할 것 없이 국회의원에 줄을 대려고 안달을 하는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고 말한다.

    법적으로 대학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사장의 남편은 교수실 하나를 사용하고 일주일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출근해 학장주재의 과처장 회의를 지켜보았다. 사무처는 교수들의 교통비 몇천원을 트집잡으면서도 이사장 남편인 설립자의 장례비 수천만원을 학교 돈으로 쓰기도 했다. 이 밖에도 크고 작은 횡령들은 만성화돼 있었다.

    가장 큰 부정은 기본재산 유용이다. 설립당시 재단은 교육부에 약정한 기본재산 100억원 중 30여억원을 금융기관에 예치했으나 잔고증명서만 발급받아 교육부에 보고한 뒤에는 재단장부에 입금기장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교직원 월급을 지불할 수 없어 사무처장 개인명의로 5천만원, 직원 두 사람 명의로 1억원을 빌리기도 했고, 학교건물 공사대금이 없어 재단 계열회사에서 자금을 차입한 뒤 기부금으로 바꿔치기도 했다. 부채 계정과 자산 계정을 의도적으로 조작한 것이다.

    이씨는 “기업생활 30년 동안에는 상상도 못할 부정과 비리가 너무나 손쉽게 저질러졌다”며 “돈 벌려고 마음먹으면 기업할 게 아니라 학교를 세워야 한다는 걸 실감했다”고 덧붙였다. 기업은 최소한 부정에 가담하고 공모할 필요인원이 있지만 사학은 두세명만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공금횡령이나 유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기업의 최고상속세율이 45%인데 비해 사학은 완전 면세이므로 자자손손 세금 한푼 안 내고 대물림할 수 있는 것이다. 기업은 세무서를 통하거나 사외이사, 노조를 통해 감사·감시를 받지만, 사학은 분규가 없다면 교육부 감사도 받지 않는다.

    감사도 업고 상속세도 없는 천국

    이씨는 “제가 근무한 사학의 문제를 중심으로 이야기했지만 수많은 학교에서 비슷한 일들이 자행되고 있다”며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하는 걸로 글을 마무리했다. 교수와 직원은 인사위원회를 구성해 공개채용하는 것을 비롯해 △교수협의회와 직원노조 구성을 제도화할 것 △이사 3분의 1 이상과 감사 1인은 교수협의회가 추천하는 공익이사(감사)로 할 것 △학장은 교수협의회에서 복수 추천해 이사회에서 결정할 것 △형사처벌받은 이사는 영구히 복귀시키지 않을 것 △일정규모 이상의 사학재단에는 외부감사제도를 의무화할 것 등이다.

    그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일부 사학재단 이해집단들이 자유민주주의를 들먹이며 사립학교법 개정을 반대하고 나선 것은 적어도 내가 겪은 일들에 비춰볼 때 자신의 돈벌이 수단을 놓치지 않으려는 의도를 그대로 드러내는 셈”이라며 “이 일은 결코 일부 사학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편집시간 2001년01월30일20시20분

    한겨레/ 사설·칼럼/ 야!한국사회

    [야!한국사회] 이참에 대학이나 세워봐?

    연구도 안하면서 `철밥통'만 차고 앉아 있다는 등의 비판 때문에 교수 노릇 하기가 그리 편하지만도 않은 요즘, 문득 다 때려 치우고 대학이나 하나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부질없는 망상에 젖어 본다.

    먼저, 가능하면 인구가 많은 대도시 주변의 저렴한 땅을 물색하되, 이미 학생부족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는 지역은 피해야 한다. 교육부의 인가를 받기가 그리 쉽지는 않겠지만, 요로에 줄을 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일은 훨씬 쉽게 처리될 것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철학과나 국문과 같은 걸 만들었다간 정원미달되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돈 많이 들어가는 공과대학이나 의과대학 같은 걸 어설프게 만들었다간 큰일나므로 주의해야 한다. 가능하면 유지비용은 별로 안 들면서 그럴 듯한 이름, 예컨대 사이버나 디지털 등의 수식어를 붙여 학생들에게 환상을 심어주어야 한다. 혹시 광활한 캠퍼스나 최소한 도서관 정도는 갖추어야 대학을 만들 수 있을 거라 지레짐작할지도 모르겠으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컨테이너 몇 개 놓고 시작한 대학들도 있었거늘 대충 비 피하고 햇빛 가릴 수 있는 건물 하나 정도면 충분하다.

    그 다음엔 교수를 뽑을 차례다. 왠만한 학문분야라면 박사학위 받고 대학에서 몇 년째 시간강사하고 있는 인력들이 널려 있다. 신문에 조그만 교수초빙공고 하나 내면 전국 각지에서 유수의 대학을 졸업한 인재들이 연구실적 보따리 한 아름씩 들고 달려올 것이다. 혹시 학교운영비가 다소 부족하다면 이 참에 돈을 좀 모을 수도 있다. 자격 없는 사람을 순전히 돈만 받고 교수 시켜주라는 뜻은 아니니까, 지나치게 민감하게 생각하지 말라.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마약거래 하듯 은밀하게 할 필요도 없다. 그저 신임교수가 `약간의 금액'을 학교발전기금으로 재단에 납부하도록 하면 뒷탈도 없고 깨끗하다.

    이제 신입생을 모집한다. 다소 진부하지만 “정보화에 부응하는 국제적 인재 양성” 따위의 카피를 붙여 매스컴에 광고도 한다. 돈이 약간 아깝겠지만 이윤을 얻기 위해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기본원리가 아닌가? 처음부터 너무 욕심내지 말고 천 명 정도만 뽑자. 그래도 등록금으로 연간 오십 억원 정도의 현찰이 들어온다. 전임교수는 열 명 정도면 충분하므로, 인건비에 부대비용까지 다 포함해도 몇 억밖에 안 든다. 교육부 권장 교수 일인당 학생 수가 스물 다섯 명인데 어떻게 하냐고? 겸임교수, 강의전담교수, 외국인교수 등등의 그럴 듯한 명칭으로 무늬만 교수인 시간강사를 쓰더라도 교육부에서는 전임교수와 대동소이하게 간주해준다. 정 귀찮은 일은 교육부에서 물러난 고위관료 데려다가 총장자리 하나 내 주면 대충 알아서 처리해 준다. 만약 일부 사상이 의심스러운 교수들이 무슨 협의회 따위를 만들어 무리한 요구를 해온다면? 적당히 들어주는 척하다가 주모자 몇 명 골라 연구실적 부족으로 걸어 재임용에 탈락시켜버리면 곧 조용해진다.

    혹시라도 유명연예인이 입학하겠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장미를 `lose'라고 쓰건, 학력인정 안 되는 외국인학교 출신이건, 홍보효과를 감안하면 무엇인들 감수하지 못하랴! 올해 받은 등록금으로 내년에 건물 하나 짓고, 내년에 받은 등록금으로는 내후년에 건물 하나 더 짓고 하는 식의 패턴만 반복하면, 부도날 걱정도 전혀 없이 아무 대학 이사장이라는 품위 있는 직함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운 좋게 지역을 기반으로 삼아 국회의원이라도 된다면, 당연히 `전문성을 살려' 교육분야 상임위활동을 통해 학교운영에 껄끄러운 법은 절대로 통과시키지 않아야 한다. 한 삼십 년 지나고 나면 학교도 어느덧 자리가 잡힐 테고 고등교육에 기여한 공로로 교육훈장이나 대통령 표창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변변찮은 아들 녀석, 만만한 미국대학 하나 골라 유학시켜가지고, 교수 몇 년 시키다가 이사장 자리 물려주면 이 또한 즐거운 일이다. 이만하면 꿩 먹고 알 먹는 장사가 아닌가?

    류동민/충남대 교수·경제학



    [교육]사립학교 탐구 보고서 3 : 사립학교를 팝니다

    2016-08-04 17:53 cocoa

    5.

    2010년 8월 26일, 한 제보자가 <추적 60분> 제작진을 찾아왔다.

    “학교가 팔릴 것 같아요. 도와주세요.”

    모 사립학교의 설립자 가족 대표로 있는 그녀는 학교가 ‘매물’로 나와 있고, 최근 거래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학교를 팔아넘기려는 이로 그녀가 지목한 사람은 전임 이사장이자 자신의 동생인 변 모 씨. 비리로 이사장직에서 물러난 그가 아들을 이사장직에 앉혀 막후 실력을 행사하며 매각을 주도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매각이 거론되고 있는 문제의 학교는 진명여고. 1906년에 개교해 100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사립학교다. 목동에 위치해 주변 환경도 좋고, 명문 사립으로 손꼽히는 멀쩡한 학교를 왜 팔려고 하는 걸까? 제보자는 전임 이사장 변 씨가 운영하던 중소기업이 최근 경영난을 겪으며 채무가 급격하게 증가하자, 학교를 팔아 채무를 해결하려 한다고 했다.

    취재에 돌입한 제작진은 실제로 매각이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한다. 이미 교직원은 물론, 학생들 사이에서도 학교가 팔릴 거라는 소문이 퍼져 있는 상황이었다. 얼마 후, 진명여고 매각 정보가 담긴 ‘학교법인 진명학원 인수의 건’이라는 결정적 문서가 <추적 60분> 제작진의 손에 쥐어졌다.


    출처 - KBS

    사립학교 브로커가 작성한 이 문서는 일종의 투자계획서로 학교 기본 현황과 더불어 투자 요소, 예상 이익, 인수 절차 등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교원 항목에서 전교조 교사를 별도로 표기하고 있는 점이 의외의 포인트. 사립학교 이사장의 전횡에 반대를 일삼는 전교조 교사은 '매물'의 관점에서 가격 하락 요인으로 작용하는 모양이다.


    출처 - 오마이뉴스

    무엇보다 이 문서에서 가장 눈에 띈 대목은 투자자들의 구미를 당기게 하기 위해 가장 힘주어 작성된 티가 팍팍 나는, ‘Ⅲ.핵심 투자 요소’ 부분이다.

    Ⅲ.핵심 투자 요소

    - 인수자의 사회적 지위 제고: 백 년이 넘는 명문 사립고 인수와 운영을 통해 사회적 지위가 제고되고, 학교 법인의 동문회 network를 통해 강력한 인적 network를 형성이 가능함.

    - 운영권 상속/증여 또는 재매각 가능: 주식회사 등 영리법인보다 운영권 상속/증여가 훨씬 용이하며, 운영권 상속/증여에 따른 제세금(상속세 또는 증여세)도 부과되지 않음.

    -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학교법인 인수: 예금 10억 원과 공시지가 기준 891억 원의 부동산을 140억에 인수 가능. 우수한 재무구조를 보유하고 있고 매년 세입과 세출이 균형을 이룸으로써 학교 운영 시 추가적인 비용도 발생하지 않음.

    통장에 돈을 150억쯤 넣어두고 사는 사람이라면 ‘으음, 괜찮은데?’ 싶은 솔깃한 제안이다. 단돈(?!) 140억 원에 900억 자산 규모의 학교를 인수할 수 있고, ‘학교 이사장’이라는 명망 받는 사회적 지위를 획득할 수 있으며, 동문 인맥까지 거져 먹을 수 있는데, 학교 운영에 추가적인 비용은 발생하지 않고 (무려) 상속까지 가능하다고 한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투자 제안서의 주장일 뿐, 실제 그러한가는 별개의 문제다. 홍보에 구라를 듬뿍 섞는 일이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상인이 취하던 전략 아니던가. 알아서 걸러 들어야 하는 게 맞다. 다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사립학교를 대하는 관점이다. 이들은 노골적으로 학교법인을 '상품'으로 인식하고, 사립학교를 투자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다.



    '노른자위, 재개발, 막대한 차익, 출연금 회수, 프리미엄 행사.'

    매각 문서 곳곳에는 이와 같은 낯익은 표현이 등장한다. 주어만 살짝 바꿔보면 '초 프리미엄 역세권, 월 150 수익 보장!'을 외치는 오피스텔 광고 전단지로 착각할 수 있을 정도다.

    앞서 살펴본 상문고가 학부모의 고혈을 짜내는 방법으로 94년도에 17억을 모으는 기적을 이룬 '재산 증식 모델로서 사립학교'에 최적화된 케이스라면, 진명여고는 학교를 투자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투기 자본주의 모델로서 사립학교'에 최적화된 케이스라 할 수 있겠다.

    이쯤 되면 어쩌다 학교를 사고 파는 세상이 되었나 싶어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실은 사립학교는 처음 생겨났을 때부터 이렇게 될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두 번째 단추쯤에서 어긋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6.

    1883년, 이제는 북한땅이 돼 버린 원산항에 최초의 근대 학교인 원산학사가 세워진다. 동해의 항구로 일찍이 개항한 원산은 일본 상인들의 왕래가 잦았고, 교역을 위해서나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나 신식 학문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여 세워진 원산학사는 외국어, 수학, 물리, 법률, 지리 등 근대 학문을 가르쳤다.


    원산소학교

    눈여겨볼 점은 원산학사가 최초의 근대 교육 기관이기도하지만, 지역 주민들의 요청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사립학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여기서 사립학교의 성격과 기능이 잘 드러난다. 국가가 주도하는 교육이 안정적이고 변화에 둔감하다면, 사립학교는 다양한 교육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유연함을 가지고 있다. 신식 학문이 들어오고 변화가 꿈틀대는 당시 상황이 사립학교의 성장에 안성맞춤이었던 셈이다.

    원산학사 이후 "쇄국정책 따위는 그만두고 신식 문물을 배우자!"는 인식이 점차 퍼지며 판이 깔리자, 외국인 선교사, 지식인, 지역 주민 등에 의해 다양한 학교가 세워졌다. 일종의 사립학교 빅뱅이었다. 여기에 한 가지 상황이 더 붙었다. 1905년 이후 조선의 국운이 급격히 기울기 시작하자 위기를 느낀 민족 지도자들이 민족 교육을 통해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며 사립학고 설립에 적극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사립학교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서구 열강을 물리치고 조선에서 우위를 차지한 일본이 이를 손 놓고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일제는 급격히 증가한 민족 교육 열기를 잠재우기 위해 사립학교 말살 정책으로 맞불을 놓는다. 1908년 사립학교령을 제정해 사립학교 인가제를 실시하고, 설립 기준을 높혀 어지간한 노력으로는 학교를 세울 수 없도록 높은 문턱을 쌓는다. 그 결과, 1909년 4월 말까지 인가를 신청한 1,708개 학교 중 인가를 받은 곳은 242개교에 그친다. 강제 병합 이후 일제의 사립학교 억압은 더욱 거세져, 1915년에는 사립학교규칙을 세워 설립 기준뿐 아니라 교육 내용까지 적극적으로 규제하기 시작했다.

    일례로 사립학교 인가를 받기 위해서는 내지인 교원, 즉 일본인을 1명 이상 채용했어야 했는데, 일본인 교원의 월급은 조선인의 3~4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1년 사립학교 운영 비용이 1,200원이었는데, 그중 45%인 540원을 일본인 교원 월급으로 지급해야 했다.


    사립보통학교 경상비 기준 견적표(단위: 원), 출처 - 사립학교의 기원

    설립이 까다로울 뿐 아니라 운영도 어렵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결국 1900년대 초 3000개에 이르렀던 사립학교는 1923년, 649개로 감소하게 됐다.

    국내에서의 사립학교 운동이 여의치 않게 되자, 국외에 둥지를 튼 학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가 1911년 개교하여 김좌진, 김원봉 등 숱한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신흥무관학교. 독립군을 양성하는 군사 교육 시설 역할도 수행했지만, 역사, 지리, 중국어, 화학 같은 과목을 배운 교육기관이기도 했다.

    이렇듯 나라가 힘이 없었던 덕분에(?) 사립학교의 첫 단추는 제 자리가 잘 맞아 들어갔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새운 학교에서 종교 교육을 했었고, 민족 지도자들이 세운 학교에서 민족 교육을 했다. 일제의 방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총독부의 서슬 퍼런 감시하에 있었던 공립학교에 비해 훨씬 자유롭게 교육을 할 수 있었다. 서양에서 카톨릭 교회의 교육 독점에 맞서 사립학교가 생겨나듯,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에 맞서 사립학교가 제 역할을 한 것이다.

    문제는, 일제시대를 건너 이승만 정부에서 터졌다.

    해방 직후 남한 사회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농지 문제였다. 당시 남한 인구 중 70%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땅에서 농사를 짓는 자작농은 13.9%에 그쳤다. 48.7%에 이르는 절대다수의 이들이 소작농이었고, 소작과 자작을 겸하는 비율이 34.7%였다. 소작도 소작 나름. 소작료를 잘 쳐 주었으면 문제 될 것이 없겠으나 일제 말 소작료율이 5~6할에 이르러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상황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북한에서 "일본 제국주의자와 민족 반역자, 대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분배하겠다."는 무상몰수 무상분배 토지 개혁을 천명하고 나섰다. 북의 압박과 남한의 여론으로 이승만은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 지주들의 땅을 지켜주려다 민란이 일어날 지경이었으니. 그렇게 이승만 정부는 토지 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토지 개혁을 목전에 둔 바로 그 시점, 고위 공무원이 땅을 사면 이상하게 그 땅이 재개발되고, 검사가 주식을 사면 이상하게 급등을 하듯, 지주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그 소문 들었나? 남한에서도 토지 개혁을 할 거라는군"
    "나도 그 이야기를 막 들은 참이네. 어떻게 할 셈인가?"
    "어떡하긴, 방법을 찾아야지!"

    이 일생일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지주들이 강구한 방법은 ①토지 개혁 전에 땅 팔기, ②토지대장에서 땅을 누락시키기, ③ 재단을 설립해 개인 명의가 아닌 땅으로 만들기 등 이었다. 가장 많이 쓰인 수법은 첫 번째인데, 해방 직후부터 농지 개혁기까지 지주층이 사전매각한 농지가 총 소작지의 49.2%에 달할 정도였다.

    그러나 3가지 방법 모두 지주들의 재산을 완벽하게 지켜주지 못했는데, 정부가 토지 개혁이 임박한 시점이 되어 토지 판매를 금지시키고, 토지를 누락시키는 방법은 간단치 않았으며, 재단을 설립할 경우 토지를 환원하기가 어려웠다.

    이때 떠오른 핫한 방법이 학교 재단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지주들 사이에서 학교 토지는 토지 개혁에 포함되지 않을 거라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고, 논 좀 있다는 지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학교 재단을 세웠다. 그 대표적인 예가 경주 이씨 집안이 1948년 10월, 13만 7천 평을 무더기로 기부하며 세운 수봉교육재단이다.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난 뒤, 1949년 농지개혁법이 재정된다.

    농지개혁법 [시행 1949.6.21.]

    1조 본법은 헌법에 의거하여 농지를 농민에게 적정히 분배함으로써 농가경제의 자립과 농업생산력의 증진으로 인한 농민생활의 향상 내지 국민경제의 균형과 발전을 기함을 목적으로 한다.
    (중략)

    6조 5항 공인하는 학교 종교단체급 후생기관 등의 소유로서 자경이내의 농지 단, 문교재단의 소유지는 별도 정하는 바에 의하여 매수한다.

    요약하자면, 국가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토지를 개혁하는데 문교 재단, 즉 학교 소유 땅은 다른 기준으로 사들이겠다는 거다. 후에 마련된 별도 기준이 무언가 하니, 토지를 납부한 지주에게 정부가 15할의 지가증권을 발급해 줬는데 학교 토지에는 15할의 지가증권을 추가로 발급해 준 것이다. 이러한 특별보상의 결과 총 775건의 지가증권이 발급되었는데, 그 대부분인 64%가 사립학교 재단이었고, 불교 재단이 13%, 향교 재단이 12%를 차지했다.



    결국 많은 지주들이 토지 개혁의 칼바람을 피해가기 위해 사립학교를 세웠으며, 그 작전이 어느 정도 통한 셈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나라 사립학교는 주로 대지주들이 땅을 가지고 있던 평야 지대에 위치하고 있고, 강원도 같은 산간지역에는 거의 없다는 말이 나오게 됐다.

    당시 <동아일보>는 이러한 세태를 비꼬아 "농지개혁에 대응하는 재산보존의 수단으로 우후죽순처럼 솟아났던 사립대학들"이라 했다. 실제 1945년부터 1950년 사이에 16개의 사립대학교가 세워졌는데, 1945년 우리나라의 전체 대학 수가 22개였던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많은 양이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과정으로 첫 단추를 잘 꾀었던 사립학교가 순식간에 어긋나기 시작한다. 교육에는 아무런 뜻도 없었던 이들이 학교를 세우고 교육자 행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교육이라는 공공의 가치보다 사익을 앞세우며 학교를 재산 보존의 수단으로 인식한 상춘식, 진명여고 전 이사장으로 대표되는 사학비리 뿌리의 등장이다.

    여기까지가 우리나라에 사학이 막 생기고 걸음마를 시작하던 단계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제 우리나라 교육에서 사학은 고등학교의 절반, 대학교의 80%를 차지할 만큼 비대해졌다. 이미 물은 엎질러 졌고, 돌이킬 수 없다. 이승만 나쁜 놈! 하고 마무리할 수 있으면 우리의 마음이 참으로 편하겠으나, 이게 또 그리 간단치 않다. 농지개혁 당시 대지주의 땅을 사립학교로 받을 수밖에 없었던 나름의 절박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여러 사회문제가 그러하듯, 사학 문제 또한 '압축적 성장'이라는 '불우한 축복'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한국 사회는 해방과 농지개혁으로 실질적인 계급제도 붕괴를 처음 체감하기 시작한다. 최소한의 기회 보장은 이뤄진 것이다. 여기에 일본강점기 내내 받은 탄압이 더해지자, 엄청난 교육열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신생 국가는 돈이 없었다. 미래를 위해 교육에 투자해야 할 필요도 있었고 국민들의 수요도 대단했지만, 보릿고개를 무사히 넘기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궁여지책으로 택한 것이 교육에 민간 자본을 끌여들이는 일이었다. 지주들은 재산을 보존할 수 있으니 좋고, 국가는 큰 돈을 들이지 않고 학교를 세울 수 있으니 좋고, 윈윈이라고 생각했었을지도 모른다.

    허나,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그런 아름다운 일은 현실에서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처음부터 교육에 민간 자본을 끌여다 쓴 우리는 기브 앤 테이크라는 만고 불변의 진리에 따라 지금까지 그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

    7.

    다시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추적 60분>에 의해 매각 문건이 폭로된 이후 진명여고는 어떻게 되었을까? 구성원들이 힘을 합쳐서 학교를 팔아넘기려던 이사장을 몰아냈다거나, 이사장이 갑자기 잘못을 뉘우쳐 학교를 성실히 운영했다는 식의 해피엔딩은 상상도 하지 말자. 그런 거는 우리에게 있을 수 없다.

    학교는 문건에 명시된 가격 140억이 아닌 75억에 팔려 나갔다. 헐값(?!)에 학교를 구입한 이는 류 모 씨. 그가 진명학원 이사장에 취임하는 것으로 2000여 명의 학생이 다니고 있던 학교의 거래가 완료됐다.

    여기서 잠깐. 사립학교 거래는 어떻게 이뤄지는 걸까? 학교법인에 속해 있는 사립학교에 학교장 임명, 교원 채용과 예산 등을 관리하는 법인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학교법인은 이사회에 의해 운영되는데, 이사회는 사실상 이사장이 원하는 대로 구성할 수 있다. 즉, 사립학교의 절대권력은 이사장이다. 하여 사립학교 매각 절차는 이사 몇 명을 측근으로 교체한 후, 매수자를 이사장에 추대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류 씨 역시 이런 방식으로 이사장에 취임하여 학교를 구입했다.


    여기서 다시 잠깐. 학교법인을 사고 파는 건 위법이 아닐까? (놀랍게도) 현행법상 학교 매매를 금지하거나 처벌하는 규정은 없다. 사립학교법에서도 학교의 해산 요건으로 다른 학교법인과 합병, 파산 등을 내걸고 있을 뿐 매매에 관한 조항은 전무하다. 최초 법안을 설계한 이들도 설마 학교를 사고팔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리라.

    따라서 현재 사립학교 거래는 법의 사각지대를 악용해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다. 법에 명시돼 있지 않더라도 처벌하려면 얼마든지 처벌할 수 있지 않을까 싶지만, (놀랍게도) 그게 그렇지 않다. 검찰이 사립학교 매매를 배임 혐의로 기소한 사례가 있으나, 2014년 대법원에서 1심, 2심의 판결을 뒤집고 “학교법인 운영권의 유상양도를 금지, 처벌하는 입법자의 명시적 결단이 없”다며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을 해 사립학교 투기에 꽃길을 깔아준 바 있다.

    즉, 편법으로 거래가 성사되고 있으나 마땅한 처벌 규정이 없어 두 손 놓고 있는 상황에서 국가는 방관으로 매매에 '소극적 기여'를 하고 있다 하겠다. <추적 60분>의 진명여고 매매 보도로 이 문제가 공론화되었음에도 교육청은 근거 조항이 없다는 근거로 “우리도 어쩔 수 없다.”만 되풀이했다.

    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진명여고 이야기는 막장 드라마로 치닫는다. 드라마의 이름은 '장안대의 우애 깊은 형제'. 주인공은 진명여고를 75억 원에 구입한 류 씨와 그의 형이다.

    류 씨는 장안대 총장이었으나, 장안대 이사장인 형과의 갈등으로 총장에서 해임되기에 이른다. 이런 경우 고성방가가 오가다 멱살잡이가 이어지고 "법대로 해, 법대로!"를 거쳐 법원으로 가 질질 끌며 싸우기 마련이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이 우애 깊은 형제는 달랐다. 감격적인 대타협이 성사된 것이다.

    마음씨 좋은 형은 장안대에서 물러나는 동생 류 씨를 위해 실거래가 100억 원이 넘는 10층짜리 여의도 건물과 20억 원어치의 유가 증권을 쥐어줬다. 게다가 학교 총장이라는 명망 높은 직함을 잃은 것까지 보상해 줄 계획을 세운다. 학교를 하나 구입해 동생에게 줄 계획을 세운 것이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바로 그때가 진명여고 전 이사장인 변 씨가 회사 채무를 갚기 위해 학교를 팔러 다니던 때였다. 양측은 후다닥 서류에 사인을 마치고 거래를 끝낸다.

    여기서 이 드라마의 장르가 막장인 이유는, 진명여고를 구입한 돈이 장안대 재산을 횡령해 마련한 비자금이었기 때문이다. 마음씨도 착하고 수완도 좋았던 형은 학교의 모든 것을 이용해 비자금을 마련했는데, 정문 공사, 학교 연수원 부지, 장학금, 스쿨버스, 건물 증축 등의 금액 일부를 빼돌리는 방식으로 68억 원을 횡령했다.


    장안대학교 정문, 출처 - mbc


    여기서 한 가지 키워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본전 심리'

    꼬박꼬박 저축해 모든 돈이건, 횡령해 모은 돈이건 소중하기는 마찬가지일 터인데, 75억 원이나 들여 진명여고를 구입한 류 씨의 머리 속에 '본전을 뽑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다는 건 너무나 간단명료한 결론이다. 과연 진명여고는 어떻게 되었을까?

    <추적 60분> 보도로 보는 눈이 많아졌기 때문인지, 그가 참교육자의 길을 걷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다행히 진명여고 이사장이 거대한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뉴스는 없었다. 다만 그가 이사장으로 재직한 시절 진명여고가 예산 낭비, 회계업무 처리 부정적, 급식 운영 부정적 등으로 서울시교육청으로부터 지적을 받은 바 있는데, 이 사건이 류 씨와 연관이 있는지 없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진명여고 외에도 매매 이후 학교가 이상해졌다는 케이스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E 고등학교는 2001년 새로운 이사장에게 매각된 이후로 재단 전입금(재단에서 학교로 납부하는 금액)이 줄었다. 이후 학교 시설과 기숙사 노후화 등이 문제가 되었는데, 관련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사장이 학교를 인수할 당시 '투자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 기숙사에 몇 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지내는지 물어봤다고 한다. 투자 가치를 따져 학교를 매수하고 본전을 뽑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립학교 재단의 노력이 잘 드러나는 케이스라 하겠다.

    학교를 구입하는 것은 인간이요, 인간인 다음에야 본전 심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터. 학교 매매는 필연적으로 교육의 질 저하와 사학 비리를 불러온다. 결국 피해는 고스란히 교육의 수요자인 학생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이렇듯 사립학교를 경제 논리로, 재산 보존의 수단으로 인식하는 태도는 해방 직후 토지 개혁 이래 쭉 이어져 내려왔다. 근래에 들어서는 그 수법이 발전하고 있기까지 하다. 최초에는 토지 개혁으로부터 재산을 보존하기 위해 사립학교를 이용했다면, 상문고 케이스와 같이 재산을 끌어모으는 수단으로 학교를 이용하고, 급기야 학교를 투자 혹은 투기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상황으로 전락하기에 이른 것이다.

    잘못 엮어진 이 단추를 누군가는 풀었어야 하는데, 제대로 손대지 못하고 세월이 쌓이고 쌓여 사학 재벌, 사학 권력이 형성돼 버렸다. 누구도 쉽게 사학 문제를 거론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던 그때,

    사학 권력과 맞장뜨는 사나이가 혜성처럼 등장한다.

    다음 편에서 계속...

    [참고자료]
    추적 60분. 학교를 팝니다 . . 2010.09.15.
    진명여고 판결문(1심, 항소심, 대법원).
    한국사 52 : 대한민국의 성립. 2002. 국사편찬위원회.
    사립학교의 기원. 2015. 학이시습. 강명숙.
    대통령기록관. 참여정부 청와대 브리핑.
    <오마이뉴스>, <동아일보>, <한겨례>

    지난 기사
    사립학교 탐구 보고서 1 : 이명박근혜의 촛불
    사립학교 탐구 보고서 2 : 단군 이래 최대 사학비리, 상문고
    [분노] 상문고를 고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