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유산, 개판 교육계 - 한글이 아까운 족속들
사학재단과의 재판거래에 의한 대법원의 위법 법률해석변경
그 결과 돈벌이로 전락한 비리학교들....그 뒤에 3각 패거리 '법조, 교육부, 국회'



박정희에게 똥개로 길들여진 대법원은 군부 정권에서 벗어나자마자, 국민으로부터 독립.... 몇몇 판사 개개인들과의 재판거래와는 급이 다른, 최초의 대규모 기획 거래를 87년경 사학재단연합과(이하 '사학재단') 체결. 그 결과물이 (박정희 똥개로 활약한 공로로 전두환 때 나란히 대법관에 임명된) 김달식, 이병후, 황선당이 위법하게 법률해석변경하여 만든 86다카2622, 그 이후 20여년간 400여명 교수 생매장 시킨 살인 판례다.

1. '대법원과의 거래 판례'(즉 86다카2622)로 절대권력 쥐게된 사학재단은 교육과 시설 투자는 내팽개치고 탈세, 횡령, 부동산 투기 등 온갖 비리를 저지르며, 그를 비판하는 교수들을 마음껏 해고하였고

사학비리 키운 이명박과 박근혜

2. 학생 등록금의 현금동원력을 갖춘 사학재단의 뇌물에 매수당한 교육부국회의원들(사학재단 임원 포함)이 사립재단의 비리 적극 방조•비호
3. 법원은 법원대로 사학재단의 정기적 상납뇌물 뿐만 아니라 해직교수들 분규로 인한 '사건 인지대 수입'으로 배때기 불림.(* 재판거래 별도, 선재성, 최영남)

필연적 석궁사건



민교협 성명서
민교협 성명서2
민교협 성명서3
민교협 성명서4
재임용 족쇄: 교수법관

사학비리범들과 그 공범
정치권의 사학재단 똥개
상춘식, 상문고
화장실 청소하는 교수들
대도 이홍하
박원국, 덕성여대

나경원과 김재호

사학비리 판사공범
사학비리, 대법원

지방법원판례
고등법원판례
성대입시부정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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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궁사건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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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호 전 성균관대 수학과 교수의 부당해직상태는 더 이상 지속 되어서는 안 된다

재판지연 규탄 탄원서,  대법원 각성 촉구 성명서,  관련기사들

김명호 전 성균관대 수학과 교수가 1995년 1월 대학입시 본고사 수학문제의 오류를 지적한 것에 대한 출제교수들과 그를 비호한 당시 대학당국의 보복조치로, 두 차례에 걸쳐 부교수 승진에서 탈락당하고 정직 3개월의 중징계를 받은 데 이어 1996년 2월 끝내 재임용에서 탈락당하는 불행한 사건이 발생한 지 근 1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 이 긴 세월 동안 김명호 교수가 당한 고통과 수모는 참으로 큰 것이었다. 그러나 과거사 청산과 인권 존중이 시대적 과제로 제기되고 있는 오늘 이 불행한 사태는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이제 김명호 교수에게 가해졌던 모든 핍박들은 없어져야 하고, 그가 다시 연구자로서, 그리고 교육자로서 활동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조치들이 지체 없이 취해져야 한다. 그는 원직 복직되어야 하며, 그가 부당 해직 당함으로써 입은 모든 정신적-물질적 피해는 즉각 보상되어야 한다.

1995년 성균관대학 대학입시 본고사 수학문제에 오류가 있었다는 것은 추후에 국내적으로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공인되는 바 였다. 나아가 김명호교수가 그 오류를 지적한 것 때문에 출제교수들과 그를 비호한 당시 대학당국에 의해 승진탈락과 정직 3개월 등의 불이익을 당하다가 최종적으로 재임용에서 탈락되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공지의 사실이다. 오직 손으로 달을 가릴 수 있다고 믿는 자들만이 이 사실들을 숨길 수 있다고 착각할 따름이다. 그러나 진실을 힘으로 억눌러 왔던 이들은, 그리고 잘못의 인정을 자신들의 권위의 실추로 여기고 잘못의 시정을 거부하고 있는 이들은 자신들이 이미 ‘벌거숭이 임금’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음을 비록 늦지만 이제는 깨달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진실이 일시적으로 패배할 지라도 최종적으로는 승리 한다’는 사실을 믿는다. 거짓의 성위에서 누리는 권위란 결코 영원할 수 없음을 우리는 그들에게 경고해 마지않는다.

부당하게 재임용에서 탈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간 김명호교수는 재임용에서 탈락당한 다른 많은 교수들과 마찬가지로 ‘ 재임용 거부는 학교의 자유재량’이라는 저 악명 높은 1986년의 대법원 판례 때문에 소송에서 패소 당하는 고통을 격어여만 했다. 게다가 이 판례는‘특별한 결격사유가 없으면 재임용이 당연하다’는 1977년의 판례를 대법원이 합당한 명분과 적절한 절차를 밟음이 없이 스스로 뒤집은 것이었다, 그런데 2003년 2월 재임용 관련 구 사립학교법 제53조의 2 제3항이 헌법에 합치하지 않는다고 헌법재판소가 판정한 것과, 2004년 4월 재임용에서 탈락되었던 김민수 전 서울대 교수가 대법원에서 승소한 것은 법원이 권위주의 시절 자신이 저질러온 잘못을 시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일로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닌 것이었다.

이처럼 법원이 일정하게는 자기쇄신의 길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중앙지법 민사23부(재판장 이혁우 부장판사)가 지난 9월 21일 성균관대를 상대로 교수지위확인 청구 소송을 제기한 김명호 교수의 청구를 기각한 것은 참으로 충격적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다, 언제 한국 법원은 권력을 지닌 자들의 편에 서서 불의를 감싸온 구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그 판결을 법원의 얼굴에 다시 먹칠을 한 치욕적인 판결이자. 법원이 진정 자기반성의 길로 나아가길 원한다면 반드시 시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대한 범죄적 판결로 단언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인권 신장에 기여하지 못해온 과거사의 청산이 시급함을 인정하는 새 대법원장이 취임한 오늘 법원이 자기정화 능력을 발휘, 잘못된 판결을 시정하는 길로 나아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금까지의 주장과 관련, 우리는 아래와 같이 우리의 요구사항을 제출한다.

첫째, 김명호 교수 재임용탈락사건은 성균관대 당국이 최소한의 이성적 분별력을 보였다면 대학 자체에서 이미 해결되고도 남을 문제이다. 때문에 우리는 성균관대 당국에게 사법적 판결에 내맡김이 없이 자금이라도 잘못된 것을 스스로 시정하는 결단을 내릴 것을 촉구한다. 성균관대 당국이 우리들의 이런 고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김명호 교수 재임용 탈락을 앞으로도 계속 정당화하고 옹호한다면, 이는 성균관대학을 자유로운 학문의 전당이 아니라 독선과 편견, 패거리주의와 보수적 권위주의의 전당으로 전락시키는 일임을 우리는 경고한다.

둘째, 법원은 교원의 권리가 헌법상으로도 보장된 중대한 권리임을 깊이 자각하고 대학으로 하여금 김명호 교수에게 가한 부당한 조치들을 즉각 시정토록 만드는 모든 법적 조치들을 취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있을 2심 판결은 법원이 여전히 구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아니면 자기반성과 인권존중의 길로 나아가는가를 판가름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이와 관련 우리는 법원에게 사립학교 교원은 국공립학교 교원과는 법률상의 지위가 다르다는 이유를 들거나 자신의 잘못을 은폐하려는 대학당국의 주장을 수용해 김명호 교수를 두 번 죽이는 일에 더 이상 가담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촉구한다.

김명호 교수 재임용 탈락과 그간의 법원 판결의 부당성은 이미 만천하에 폭로되었다. 우리는 김명호교수사건을 제2의 김민수교수사건으로, 아니 김민수교수사건보다 더욱 심각한 인권 침해의 사건으로 간주한다. 김민수교수사건은 7년 만에 해결의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반면 김명호교수 사건은 이미 10년을 넘기는 사건이 되고 있다.
이제 이 사건은 인권존중과 사회정의 구현의 사대적 흐름에 맞게 종결되어야 한다. 그럴 수 있도록 우리는 진실의 승리를 믿는 모든 사람들과 힘을 합쳐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우리는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2005년 11월 2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주주의 법학연구회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전국교수노동조합천주교인권위원회




김우종의 대학비사 (3)

한국교육위원회 성립, 그러나 주도 세력의 친일 행각은 여전히 숙제로….


이일형 news@unn.net 승인 2000.03.13 12:05

8·15 직후부터 잘못 돌아가기 시작한 현실은 중학교 2학년생이던 나에게 있어서도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내가 겪은 몇가지 경험담을 통해 당시 상황을 가늠해보자. 미군이 처음 개성에 들어온 것은 45년 9월 13일이었으나 소련은 그보다 한달여가 앞선 해방 직후부터 이미 지금의 북한땅 대부분을 점령해 들어갔다.

나는 고향인 황해도 연안읍에서 해방을 맞이했는데 소련군 몇 명이 38선을 넘어와 손목시계 등을 약탈한 후 일본인 코주부네 집에 들어가서는 그 집 딸을 윤간하고 돌아갔다. 어른들은 그때 "로스케들이 저기서 지금 못된 짓을 하고 있는 중이야"라고 말했는데 나도 어른들 틈에 끼어 그 집을 바라보고 있다가 집에 돌아가 어머니께 말하고는 큰 걱정을 듣기도 했다.

개학이 되어서는 개성에 가 있으면서 미군들이 일본 여자들을 겁탈하는 실제 장면을 몇차례 목격하기도 했다. 개성 공설운동장 수용소에는 매일 많은 일본인들이 끌려왔는데 저녁만 되면 미군들은 총부리로 젊은여자들만 골라내어 앞세우고 숲 속으로 들어가 허여멀건 엉덩이를 내리고 그 짓들을 일삼았다.

나는 친구들과 몰래 그들 뒤를 따라가 숨을 죽여가며 실제 포르노 장면을 훔쳐보다가 도망치곤 했었다. 이런 걸 보면서 나는 어린 마음에 묘한 해방의 의미를 실감했다. 한국 여자들은 봐주고 일본 여자들만 겁탈하는 것이 이 땅에서의 해방의 의미라고.

이런 이상한 포르노를 구경하던 무렵에 이영철 선생(아동문학가)이 지팡이를 짚고 내가 다니던 송도 중학교에 나타났다. 부친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된 지 얼마 안되어서 자신도 끌려가 참혹한 고문을 당하고 불구자가 되어 돌아 온 것이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친일파 선생들이 쫓겨났다. 애국자와 친일파가 교대한 것이다. 이때까지 나는 해방의의미를 나름대로 실감하면서 변화된 환경에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음해 1946년 봄에 이변이 일어났다. 지난해 쫓겨났던 친일 교사 다카야마 선생이 다시 학교에 나타난 것이다.

"어이, 도미나가, 학교에 가지? 어서 타"

나는 아침에 등교하다가 갑자기 옆에서 급정거한 미군 짚차를 얼떨결에 타게 되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창씨개명 때의 내 이름을 부른 것에 놀라기도 했지만 쫓겨난 친일파 교사와 함께 미군 짚차를 얻어 타고 등교하는 모습을 다른 아이들이 보게 돼 창피했다. 그러면서 그가 왜 갑자기 그런 모습으로 나타났는지 한편으론 몹시 궁금했다.

그런데 이런 궁금증은 다음 날 온 교내에 소문으로 퍼져 곧 알게 되었는데, 그는 학교에서 추방되자마자 서울로 가더니 벼락출세 길을 달려 군정청의 고위 관리가 되어서 학교로 찾아와 보복을 하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군정청 지시라는 명목으로 일장 훈시를 하며 불구자가 되어 돌아온 애국자 선생까지 앉혀놓고 겁을 줘 가면서. 그는 그 후 관재청장이 되었다.

또 다른 친일교사 도요가와 선생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그는 학무국은 아니었지만 역시 군정청에 들어간 후 경찰 간부가 되어서 번쩍거리는 장식들이 요란하게 달린 옷을 입고 돌아와 교내를 한바퀴 돌며 시위를 하고 돌아갔다.

그때 한 체육선생이 운동장에서 우리들 틈에 있다가 그를 바라보며 내뱉은 말이 생생하다. "개판이군. 미친 개새끼들한테 또 물리게 생겼어"

해방이 되었음에도 세상 꼴이 이렇게 뒤틀려 버린 까닭은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 해방 초기 구성된 한국교육위원회 성격에서부터 이 같은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보기로 하자.

○ ○ ○ ○

9월 10일 점령군으로서 군정장관에 임명된 아놀드(A. B. Annold) 소장은 일본인 관리들을 존속시킨 채 부처별로 미군 담당관을 임명, 본격적인 군정을 펴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한국에 대한 사전 정보나 준비가 거의 없었으며 더욱이 한 나라의 행정을 지도할 만한 지식과 경륜을 갖춘 미군측 장교들을 갖지 못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 트루만이 후일 작성한 회고록에서도 이 같은 점을 짐작케 한다.

"2차대전 전, 한국에 대해 아시아의 동쪽 먼 끝에 위치한 이상한 나라라는 정도 이상의 지식이나 관심을 가졌던 미국인은 거의 없었다. 극소수의 선교사를 제외하고는 1945년 미국 점령군이 한국에 상륙할 때까지 미국인들에게는 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알 수 있는 기회는 드물었다"

9월 11일 교육담당관에 임명된 락카드(E. L. Lockard) 대위는 첫날부터 총독의 마지막 학무국장이던 엄상섭의 자문을 받았다. 교육 전문가도 아니고 한국 실정에도 캄캄했던 그로서는 명령을 받고 일을 수행하는데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친일파 거물이라는 것만 빼고는 해방 후 한국인의 교육 문제를 미국인에게 말해줄 인물로 그보다 적임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엄상섭 등의 소개로 다음날부터 학무국에 참여하게 된 오천석, 백낙준 등 미국 유학파들은 이를 계기로 후에 문교부장에 오르는 등 미군정기 초 교육체제 주도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면 과연 이들은 어떤 배경을 가졌던 인사들일까?

미군정 초기 교육 관련 단체는 9월 16일부터 자문 회의를 시작한 한국교육위원회를 비롯해 조선교육심의회와 뒷날 월북인사들이 많이 참여했던 조선학술원 등이 있었지만 특히 한국교육위원회는 각 도의 학무국장 이하 읍 면의 교장인사까지 도맡아 역할을 하는 등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조직에 참여한 인사 가운데 오천석, 유억겸, 김활란, 백낙준, 김성수, 김성달 등 핵심 맴버들은 미군이 상륙하기 전부터 이미 비정규적인 모임을 가져온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이화여전의 김활란이 주선한 천연동 모처에서 8월 하순 이후 3∼4회에 걸쳐 미군 진주 이후의 우리나라 교육 문제에 대해 토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모두 해방되던 날까지 교육계를 대표할만한 인물이었다. 그 중에서 한국교육위원회에 참여한 인사들은 대체로 연희전문, 보성전문, 이화여전등을 대표하고 있었으며 김성달은 초등교육계의 대부로서 배경이 막강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는 일제 시대 친일 행위에 가담한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의 친일 행위는 애국자들을 잡아다 족치던 경찰이나 독립군을 잡으러 다니던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의 친일만큼 눈에 띄는 악독한 일들은 아니었지만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 경성기독교연합회, 조선군사후원연맹, 조선임전보국단부인대, 조선보국단부인대 등의 단체를 통해 우리 민족을 일제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몰아넣는 악의적인 선동과 기만적 연설을 주도했던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특히 우리사회의 지도적 인사로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배신감이 컸고 교육계에 파급효과가 컸다는 점에서 당시 뜻 있는 지사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물론 이런 행위는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고, 학교 운영자로서 불가피한 경우도 있었다고 하지만 과거에 행한 과오에 대해 민족 앞에 솔직하게 고백하고 최소한 사과 한마디라도 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사과가 있어야 용서도 있고 화해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들의 과오는 비단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해방 후로 이어졌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들의 친일 경력은 뒷날 민족교육 확립의 당위성과 다양성을 염원하는 민중들의 의지를 반영하는데 걸림돌로 작용했으며, 미군정의 비호 아래각도의 인사권마저 휘두르게 되면서 일제 잔재 청산을 바라는 열망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리고 3년간의 미군정을 거쳐 그 기반이 그대로 신생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면서 우리 교육계는 첫 출발부터 올바른 길을 찾기 어려운 지경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쫓겨난 친일교사가 학무국 고위인사가 되어 학교에 다시 나타나 큰 소리를 치게 된 배경도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그럼 이제 실세들의 이 같은 과거와 함께 이들이 속한 정당이나 계급관계, 출신학교와 종교관계 등 다양한 성향을 복합적으로 따져보면서 그것이군정 초기 우리 교육 방향에 어떤 모습으로 작용하고 여과되었는지 파악해보자 <다음호에 계속> 【취재지원=이일형 차장】

● 한국교육위원회(The Korean Committe on Education)

1945년 9월 12일 락카드의 요청으로 참여하게 된 오천석의 1차 임무는 미군정 학무국과 당시 한국의 교육지도자들과의 회담을 주선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락카드는 9월 16일 오천석 등의 추천으로 만난 교육계 인사들 가운데 1차로 16명을 다시 불러, 그들로 하여금 자문기관을 구성하기 위해 교육계를 대표할 전문가를 투표로 선출할 것을 제의했다.

그 결과 초등교육부문에 김성달을 비롯, 중등교육 현상윤, 전문교육유억겸, 고등교육 김성수 등이 뽑혔으며, 교육전반에 백낙준, 여자교육에 김활란, 일반교육에 최규동 등 모두 7명이 선출되고 이들이 바로 한국교육위원회를 결성하는 핵심 맴버가 되었다.

그후 9월 22일에는 김성수가 교육담당관의 고문이 되고 군정장관의 추천으로 그 자리에 백남훈이 위원으로 취임하였으며 11월에는 의학교육에 윤일선, 농업교육에 조백현, 학계 대표에 정인보 등이 참가하여 10인 위원회가 구성됐다.

한국교육위원회의 공식 성격은 자문기관에 불과했으나 실질적으로는 교육 전반에 걸쳐 중요한 모든 문제를 심의·결정하였고 각도 교육책임자 및 기관장과 같은 주요 인사문제를 다루면서 정치적 기반을 갖춘 교육 핵심 세력으로 급격히 성장했다.

(주)한국교육위원회=조선교육위원회는 동일한 기관으로 해방 후 혼용되었다)

미 군정 초기 교육 주도세력의 단체와 구성 인사
단 체 명 주요 구성원
한국교육위원회 유억겸, 김성수, 백낙준, 김활란, 김성달, 현상윤, 최규동, 윤일선, 조백현, 정인보, 백남훈 (감성수 후임으로 참여)
조선교육심의회 하경덕, 백낙준, 김활란, 홍정식, +정인보, 유억겸, 김준연, 김원규, 이훈구, 이인기, 오천석, 최규동, +최우선, 현상윤, 이묘목, 사공환, 이호성, 이규백, 이승재, 정석운, 조동식, 고황경, 송석화, 서원출, 이홍종, 정문기, 장면, 조백현, 장이욱, 장덕수, 김애마, 신기범, 손정국, 허현, 유진오, 김성수, 박종홍, +조병옥, 최현배, 장지연, 조진만, 조윤제, 피천득, 황산덕, 김성달, 심효섭, 이용설
조선학술원 박병래, 최상체, 고병간, 윤일선, 최규동, +정구충, 정문기, 이양하, 이원철, 박동길, 최경열, 조백현, 이병도, 윤일선, 김준연, 최현배, 이태규, 김계숙
조선교육연구회 최현배, 조윤재, 사공환, 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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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형
news@unn.net


김우종의 대학비사 (4)교육 주도 세력들의 성향과 평가

이일형 news@unn.net 승인 2000.03.15 12:05

1945년 8월 하순의 어느 날.

연희전문, 보성전문, 이화여전을 대표하는 유억겸, 백낙준, 김성수, 김활란 등은 서대문구 천연동 소재 김활란의 친구집에 모여 미국을 맞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여기에 김활란과 같이 컬럼비아 대학 교육학 박사를 거친 오천석이 참석했다.

"학제는 어떻게 할까요? 내 생각으로는 6·3·3·4제가 좋을 듯한데 …""예,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6·3·3·4제를 새로 실시하고 있는데 인기가높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같이 가난한 형편에서는 중등교육과정이 6년이나 5년이 되면 학부모들의 부담이 커서 중도에 학업을 중단하는 일도 많으니까…"

김성수의 제안에 오천석은 이렇게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지금의 교육제도인 6·3·3·4제가 해방 후 처음 모인 이들 천연동 그룹에 의해이미 구체적으로 논의되고 있었다.

한국교육위원회의 핵심세력으로 성장하게 되는 이들이 이미 미군 진주이전부터 모임을 갖고 한국 교육체제 전반에 대해 의견을 나누게 된 것은교육배경이나 학문, 사회적인 영향력에 비춰 미군정과 스스로 상당한 관계가 맺어질 것을 확신한데서 나온 행동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들은 친일 경력 등으로 떳떳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교육계를 이끄는 대표자 그룹이었으며 미군 교육담당관 락카드 대위를 만난 이후부터는 우리 교육계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실세가 되었다.

이 당시 교육 단체는 유억겸, 김성수 등 11명이 참여한 한국교육위원회를 비롯해 오천석 등 60여명이 참여한 조선교육심의회와 이병도 윤일선 등 20여명이 참여한 조선학술원 등이 있었지만, 특히 한국교육위원회는 각 도의 학무국장 이하 읍 면의 교장인사까지 도맡아 하는 등 막강한영향력을 행사했다.(339호 기사 참조)

그렇다면 미군정 3년간 한국교육계를 좌우했던 이들의 출신 성향이나 배경은 어디에 바탕을 두고 있었을까?

○ ○ ○ ○

초기 교육위원들의 성향을 분석하려는 경향은 미군정을 재해석하려는 의식이 확산되면서 시작됐다. 그간 학계에서 나온 논문을 토대로 이들의 성향을 분석해보면 몇가지 점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유억겸, 김활란, 안재홍, 송석하, 장면 등 미군정 초기 교육 활동에참여한 인사는 대부분 양반이나 관료, 중산층 이상의 계급에 속한 보수적 인사가 많았다.

또 이들의 학력은 미국이나 일본, 중국, 영국 등지에서 고등교육을 마친 고학력자가 대부분으로 특히 미국의 컬럼비아대학과 일본의 도쿄대학 및와세다대학, 그리고 한국의 경성제대 졸업생 출신들이 인맥을 형성했으며안재홍, 김활란, 정인보, 조병옥 등 기독교계 인사가 많았다.

이들은 특히 김성수, 유억겸, 김준연, 백남훈 등 한민당과 관련을 맺은인사가 30여명, 흥사단에 관여한 인사가 30여명, 이와 유사한 우익계열의 족청 인사도 10여명에 달했다.이밖에도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일제 시대 교직에 몸담으면서 친일 또는 부일 행각을 벌였다는 점 등을 주요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중산층 이상이라는 계급성과 친일, 한민당과의 관계 등은 모두 하나의 뿌리에서 자라난 것임을 짐작하게 된다.사실 일제의 특성으로 볼 때 중산층 이상의 여유 있는 생활을 유지하려면독립투사나 그 후원자로 계속 남아있기는 어려운 세상이었으며, 반대쪽에 더 가까운 인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일제로부터 미움을 샀던 중산층들은 대개 몰락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친일 인사가 적지 않았다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는 그들의 배경과 그리 무관할 수 없었다.

한민당이라는 것도 그렇다. 김성수, 유억겸, 안호상, 백낙준, 현상윤, 장지영 등 교육 위원 다수가 한민당에 관여했으며 흥사단에 복수로 소속된 인사가 적지 않았다. 그렇다면 한민당은 어떤 정당이었던가? 이승만을 대표로 하는 한민당은 친일인사들까지 모인 보수 우익 정당으로 그들이어떤 역할을 해 나갔는지는 이미 역사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결국 참여 인사들의 이같은 색깔들이 여과되면서 미군정 초기부터 우리교육은 중앙집권적, 하향적, 보수주의적 색체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같이 경향이 뒷날 민족교육의 실패와 분단 고착화로나타났으며 민족 다수가 염원하던 친일 청산과 역사적 심판은 요원한메아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우리처럼 나라를 잃고 살아남고 또 다시 강대국에 점령당한 민족으로서 올바른 민족적 자각보다 더 중요한 교육이 어디 있었을까? 그리고 이 당시 민족교육으로서 가장 시급한 실천적 과제의 하나는 분단 고착화를 막는 것이 아니었던가?

친일 청산과 역사적 심판 역시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친일 청산없는 민족교육이 있을 수 있을까? 일본어 중심에서 한글교육으로 전환했다지만 이것만으로 마치 민족교육을 수행한 것으로 이해된다면 이는헛 구호요 기만일 수밖에 없다. 특히 미군정 3년이 지난 뒤 구성됐던 [반민특위]마저 경찰에 의한 백주의 태러로 무산되면서 친일파에 대한 역사적 심판은 이 땅에서 요원하게 되었다.

물론 이 같은 잘못을 교육계 인사들만의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이해가 당시 미국이 원했던 점령정책과 일치했기 때문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미군정의 교육정책이나 이념의 큰 틀은 소련과의 대치상황을 고려해 그들의 이익이나 이해를 최우선으로 반영시키면서 교육계에 반공·보수·우익의 논리를 강요했던 것이다.

특히 미군정은 해방 후 한국사회가 일제 황민화 정책에 의해 교육계를 이끌 인재가 부족하다고 판단, 사회의 중요정책 중 하나인 교육정책도한국사회에 대한 올바른 파악없이 수립, 실행함으로써 일본식 교육방법과미국식 교육제도를 접목하는 기형을 낳게 되었다.

결국 미군정은 참여 인사 중 이해관계가 맞는 일부 교육 관료들과 중요한 일들을 처리함으로써 해방 후 당면 과제인 분단과 교육자 부일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으며 우리나라 교육에 있어서는 씻을 수 없는 오점을남겼다. <다음호에 계속>【취재지원=이일형 차장】

@ 교육 주도 세력 4인방의 친일 행각

천연동 그룹으로 대표되는 실세 그룹들의 성향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들은 향후 한국 현대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인물로 공과에 있어서는 아직도사가들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반민족문제연구소가 해방 50주년을 맞아 발간한 친일 관련 사료를 토대로 과거 행적을 되짚어본다.

● 유억겸 : 한말 개화파 태두로 갑오개혁의 핵심인물인 유길준의 둘째아들 유억겸은 1922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바로 연희전문 교수가 됐으며, 부학감, 부교장을 거쳐 해방 후 교장이 되었다.

형 유만겸이 시종 일본 총독부 관료로 출세 지향적이었던데 반해 처음에는부르주아 민족운동에 참여했던 유억겸은 YMCA와 조선사정연구회 등 민족주의 계열의 활동에서 이승만 동지회와 연관을 맺었던 흥업구락부 사건이 터져 가담자로 몰리면서부터 '친일군상'의 길에 들어선 것으로 알려진다.

이후 그는 1938년 기독교 조직의 친일회에 가담한 것을 시작으로 1939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의 제3분회장, 흥아보국단 준비위원, 임전보국단 이사, 학도병 종로익찬회, 언론보국회 명예이사 등 일제 말기 친일 단체의 본산에서 자신의 학생들을 전장으로 몰아넣는데 일조했으나 해방 후 미군정청의 학무국장이 되었다.

● 김성수 : 사가들에게 양극단의 평가를 받는 김성수는 1914년 일본와세다 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1919년에는 경성방직주식회사를, 1920년에는 동아일보를 설립했다. 이후 1945년에는 한국민주당,1949년에는 민주국민당을 창당하고 1951년에는 부통령에 당선되는 등 교육·언론·정치 등 한국 현대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그러나 본인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그는 몇 가지 점에서 친일 행각을 모면할 수 없게 된다. 그는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직후부터 이른바 '시국강연'의 연사로 참여함으로써 일제의 전시동원정책에 협조했으며,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및 이사로, 1941년에는 흥아보국단 이사 및 임전보국단의 감사로, 1943년에는 당시 보성전문 교장 자격으로 총독부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징병제와 학병제를 찬양하는 장문의 논설을 게재하는 등 해방 이전까지 학병을 권유하는 각종 담화와 논설, 학부모 간담회 등에 참여, 친일에 가담했다.

● 백낙준 : 제자를 침략전에 내몰고도 추앙 받는 교육자 백낙준은 미국 예일대학을 나온 엘리트 유학파로, 귀국해서는 연희전문 교수직을 맡으면서부터 친일 연사로 활동해 '나의 길 나의 노래'(1927년)를발표하는가 하면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이사로 참여하면서 친일좌담회인[미·영 타도좌담회]에서 '대동아전쟁의 숭고함' 등을 역설했다.

특히 당시 대표적인 친일단체인 조선언론보국회와 조선기독교연합회, 기독교신문 등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43년 12월에는 친일신문인 [매일신보]에 '영원히 광망 뻗도록'이란 기고문을 발표하는 등 언론과 기독교단체를 통해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동조하는 주장과 논설을 폈다.

그러나 그는 해방후 항일 투사로 미화되면서 1951년에는 문교부장관에, 1957년에는 연희전문과 세브란스의전이 통합된 연세대 초대총장에오르면서 연세대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으며 1958년에는 반공연맹 아세아지구 의장으로, 1960년에는 초대 참의원 의장에 오르는 등 정계와 교육계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하는 민족주의자로 변신했다.

● 김활란 : 여성 교육의 대모로 알려진 김활란은 1918년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1931년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 이화여전 등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1937년부터 총독부가 주관하는 방송선전협의회,애국금채회 등에 참여했으며, 임전대책협의회, 임전보국단 등 일제의 황민화와 내선일체, 침략전쟁을 지원하는 각종 관변단체 간부로활동하면서 친일 행각을 벌였다.

1941년에는 임전보국단결전부인대회 및 강연회에, 1942년에는 싱가포르 공략 대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했으며, 이화여전 교장으로 있던 1942년 12월[신세대] 잡지에 '징병제와 여성의 각오'라는 글에서는 '전쟁에 나간 남편이나 아들의 유골을 눈물 없이 맞자'고 주장하는 등 어처구니없는 논설과 강연을 일삼았다.

그러나 그는 해방 후 이화여대 총장과 배화학원, 국제대학, 동구학원, 금란여중고 등 여러 학교의 이사장을 맡았으며, 6·25 때는 공보처장, 1965년∼70년에는 대한민국 순회대사, 한국아시아연맹 이사 등 정치활동에까지 참여, 사후에 대한민국 일등수교훈장을 받기도 했다.

□ 알림

[김우종의 대학비사]에 독자 여러분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아울러 본지 대학비사(337호) 기사 중 일부 내용에 대해 숭실대 홍보팀의 이의제기가 있었으나 지면 관계상 반론문을 인터넷 [독자제언] 코너에수록하오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숭실대 홍보팀은 대학 설립과 관련 '숭실대가 대한제국 시대 고종으로부터처음 인가 받아 1906년 첫 고등교육을 실시한 유일한 대학'이라는 등의 논지로 성균관을 고등교육의 기원으로 삼은 본지 기사 방향에 문제점을 +지적했으나 이는 근대교육의 개념을 보는 역사 인식의 차이로 이에 대한 입장을 자세히 서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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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형


김우종의 대학비사 (21) 전직 대통령의 못다 이룬 총장 꿈(2) : 박정희와 영남대

이일형 news@unn.net 승인 2000.09.21 12:05

박정희 전 대통령은 퇴임 후의 안식처로서 대학을 생각했다. 최고 권력을 +휘두르던 그가 그 자리에서 물러난다면 대학 이상 적당한 자리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권력에는 명예도 따른다. 그러나 권력도 권력 나름이다. 명예는 협박과 공갈에 의해서 강요된 허깨비 명예에 불과하다. 특히 4·19 혁명으로 얻은 민주정부를 총검으로 약탈한 군사독재자에게 있어서는 그가 집권 후에 아무리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하더라도 역사의 발전을 거스른 반민주적 +약탈자의 원조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명예를 찾는 길은 우선 그 권좌에서 물러나는 일이며 그 후 인재양성에 힘쓰며 좋은 대학이나 운영해 나간다면 그곳이 안식처도 되고 또 명예도 돌아올 수 있는 길이었을 것이다.

그의 재임 중에 영남대학이 만들어지고 그 후 맏딸 박근혜가 재단이사장이 되기까지는 박정희의 이 같은 퇴임 후 계획에 영향을 받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영남대학은 박정희가 국가 최고 통수권자로서 하루 아침에 만들어낸 신생대학이 아니었다.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을 합병시켜서 영남대학이 된 것이다. 이미 임자가 있던 두 대학이 박정희에게 넘어간 것이다.

그렇다면 원래 주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대구대학의 설립기성회 회장이던 최준은 86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거의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가문에서는 박정희의 약탈에 대한 원분을 +완전히 삭여내지 못하고 있다. 다만 누가 그 대학의 주인이 되든 외국에 빼앗기지 않고 이 나라에서 인재를 키워주는 대학으로 남아있게 된 것만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함께 주인이 떠나고 박정희의 영남대학이 된 청구대학의 경우는 사정이 좀 달랐다.

○ ○ ○ ○

5·16 후에 청구대학은 재기불능의 재정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이때 최해태 학장과 심재완 도서관장 등을 중심으로 한 경영진이 다른 교수들과이런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대구대학도 재정이 어려워지니까 삼성을 끌어들였어요. 거대 재벌을 만나서 발전의 기틀을 다지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방법을 찾아야 하지요. 재단이 변변치 못하면 권력이라도 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

여기서 권력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러면서 이들은 다 같이 박정희를 생각했다. 최고 권력자 박정희가 바로 대구 사람이 아닌가?

그래서 국가 최고의 권력자를 맞이해 들이는 작업이 시작되고 그 로비를 맡은 적임자로서 이은상이 등장한 것이다.

이은상이라면 박정희가 모를 리 없었다. '가고파'의 시인을 모를 사람은 대한민국에 거의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그가 바로 청구대학의 국문과 교수였다.

중대한 사명을 맡은 이은상은 그로부터 한달 후 청구대 학장실에서 이렇게 말했다.

"며칠전 광주에서 이후락 대통령비서실장을 만났어요. 취지를 잘 설명하고대통령과의 면담을 부탁했는데 일이 잘 될 것 같습니다. "

그 후 다시 한달이 지난 후 마침내 이은상은 청와대에서 박정희를 만나 심각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대구는 각하의 고향입니다. 그동안 각하는 무관으로 대통령을 했으니문관으로도 이름이 남아야 할 것 아닙니까? "

"그게 무슨 소리요?"

박정희는 짐짓 사전 지식이 별로 없었던 듯 이은상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대통령은 백년 동안 할 수 없는데 그만두면 빗자루 들고 돌아설 생각은 해 보셨습니까? 회사 사장이 될 수도 없고, 외국에서는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물러나 대학 총장을 했는데 각하가 못할게 뭡니까? 또 그만큼 떳떳한 일도 없을 듯 합니다. 마침 대구에 있는 청구대학이 재정부담에 시달리고 있고 구성원들도 이를 원하고 있는 터이니 이 참에 대학도 하나 구하고 여생을 편안히 보내시지요."

안 그래도 박정희는 변화무쌍한 현실 정치에 대한 부담을 느끼고 있던 차에 퇴직 후를 염두에 둔 이은상의 제의가 솔깃하게 들렸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날 이은상과 박정희의 대담은 두시간 반 동안이나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박정희는 힘있는 어조로 말했다.

"그래요? 그렇다면 내가 한번 맡아보지."

이렇게 해서 청구대학은 박정희와 실질적인 관련을 맺기 시작했다.

박정희 자신이 재단 이사장을 하지는 않았지만 청구대학의 이사진이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던 이후락을 비롯, 이효상 전 국회의장, 백남억 전 공화당 의장과 이동령(문경시맨트), 김성곤(쌍용) 등 그의 뜻을 받든 +공화당 중진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박정희는 청구대학의 실질적인 교주로 추대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보면 청구대학은 박정희에게 빼앗긴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청원에 의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처럼 대학이 재정적으로 재기불능 상태가 되어서 구명을 호소하게 된 원인제공자가 박정희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5·16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대학정비에 착수하면서부터 사학들은 정원이 줄고 이 때문에 재정난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연세대같은 경우 80여명의 강사부터 목을 잘랐다. 이화여대, +성균관대, 고려대, 단국대, 국민대 등 거의 모든 사학들도 예외없이 허덕이게 될 때 처음부터 재정기반이 약한데다 야간대학에 불과했던 청구대학으로서는 그 같은 문교정책이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러므로 청구대학이 백기를 들고 박정희에게 구명을 호소한 원인은 바로 박정희에게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 ○ ○ ○

청구대학은 독립촉성경북청년총동맹의 최해청 위원장이 장인환 +대구시보사장의 도움을 얻어 무산 근로 계층을 대상으로 실시한'대중대학강좌'가 모태가 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최해청은 경술국치 후 망국의 한으로 청도군수직을 박차고 평생 두문불출했던 지사 최현달의 들째 아들로 어려서부터 부친의 영향을 받아 +대구와 일본 등지에서 항일, 반전 활동을 주도했던 지식 계층이었다.

그는 1947년 11월 대구시보사의 독립운동국장에 취임한 이래 배움의 길을 찾는 근로 청소년들을 위한 대학 강좌를 계획하다가 48년 1월 15일 '제1차 대중대학강좌'를 3주 코스로 실시했다. 그런데 뜻밖에 이 강좌는 근로 +청소년 5백여명이 모여들면서 성황리에 끝났고, 여기에 고무된 주최측이 추가 개설한 강좌도 근로 학도들의 열렬한 호응으로 횟수를 거듭했다.

그리고 급기야는 마지막 강좌가 끝난 5월 30일 대구 금호강변에 모인 학생과 지사들의 자발적 발의로 '대구야간대학기성회' 결성을 보게 +되었다. 이날 결성된 기성회에서는 회장에 장인환 경상북도지사가 추대되고 최해청, 안태섭이 부회장에 선임되었으며 지역 유지 20여명이 가세하면서 힘을 얻어, 그 해 11월에는 [대구문리과전문학원]의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이같은 호응이 사회적 관심을 얻게 되면서 대구문리과전문학원에는 참여를 희망하는 유지들이 모여들었다. 특히 1949년 8월 경북포화조합 이사들이 +재산을 기부한 것이 계기가 되어 재단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침내 1950년 4월 25일에는 문교부의 정식 인가를 받은 재단으로 거듭나 초대 이사장에 정종수, 학장에 최해청이 취임, 대학의 모습을 갖춰갔다.

그런데 대구대학은 청구대학과는 사정이 좀 달랐다.

대구에는 박정희가 나온 대구사범이 있었다. 공부는 잘하지만 가난한 집 아이들이 많이 간 사립학교다. 여기에 해방이 되자 처음으로 대학설립운동이 일어났다.

45년 10월 20일 경북교육협회장 이규원을 중심으로 지역 유지 30여명이 대구시 북성로에 있던 경북산업주식회사 2층에서 대학설립준비워원회 구성을 결의한 것이다.

설립준비위원회는 그 후 몇 차례의 모임을 갖고 경북 도내 각계 유지와 기관장이 참여한 가운데 경북종합대학기성회를 발족하고 회장에 최준, 부회장에 이규원, 사무위원에 조용기를 선출하는 등 본격적인 모금 운동에 착수했다.

그런데 본사 취재팀의 확인 결과 설립 초기의 성격과 모금 과정에 다소 증언이 엇갈렸다. 대구에서 해방 직후부터 대학설립과정과 성장과정을 지켜봤던 한 원로교수와 대구대 설립 당사자인 최준의 가문에서 증언한 내용에 중대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퇴직한 이 원로 교수 증언에 의하면 설립과정에서 많은 재산들을 기탁한 사람들은 주로 일제시대에 부일 경력 등이 있던 지주계급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의 재산기탁이 있기 전 초기 모금 활동은 해체를 고려할만큼 순탄치 +않았지만 각 군수들의 협조와 도지사, 고등법원장 등 대구 지방 기관장들의 연명을 받아 부호들을 차례로 설득한 끝에 거액의 토지 1백여만평과 현금 출자를 받으면서 힘을 얻었다는 것.

그의 증언에 오른 사람 가운데 한 인물이 경주 갑부 최준이다. 그리고 전답 24만여평과 현금 8백60만원을 희사한 대구의 정해붕을 비롯 +이상렬(전답48만5천여평), 이상호(전답 19만여평), 추병화(전답 +4만2천평), 안주홍(임야 5만4천평), 김석주(임야 1백29정), 이유득(임야1천여평) 등도 다액 기부자로 거론되고 있다.

그런데 설립자 최준 가문의 주장은 이와는 다르다. 일제 때 부일 활동으로 부자가 되었다가 해방이 되자 속죄의 뜻으로 재산을 기탁했다는 데 대해 그들은 격분을 금치 못했다. 독립유공자를 친일파로 몰아버렸다는 것. 그리고 그 많은 재산을 내놓은 애국적 동기를 과거의 죄과에 대한 속죄로 여기다니 억울하고 분해서 참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최준의 한 손자가 제시한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이에 대한 반증 자료다.

{ … 최 준(崔 浚) : 1884. 7. 27 ∼ 1970. 10. 13. 경북 경주사람이다. +그는 경주지방의 대지주로서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에 관계하면서 거액의 자금을 제공함으로써 독립운동단체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특히 +대한광복회 총사령인 박상진과는 사촌 처남의 관계로 자신의 재력을바탕으로 대한광복회의 재무를 맡기도 했다.

대한광복회가 발각될 때 이에 연루되어 피체되기도 했던 그는 3·1 운동 +이후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역시 거액의 자금을 송달하였다. 한편 그는 1921년 9월 태평양회의에 보내기로 한 청원서에 경주대표로 서명하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

국가보훈처에의 기록 내용에 의하면 대구대 설립자 최준은 조국 광복에 크게 기여한 공로자였으며, 당시 설립기성회장으로서 현금 40만원과 장서 5천5백권을 기증하고 재단법인 인가 신청을 내 1947년 9월 22일 문교부 인가를 받은 설립자였던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취재 지원=이일형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