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궁테러'가 아니라 법원에 의한 '재판테러'다

김명호 교수에 대한 형사재판의 문제점- 김명호에 대한 재판은 재판이 아니었다.-

석궁의 필연성
'석궁사건'은 한국사회의 비리 부정에 대한 의거 - 중대 영문과 강내희
부산지검 주최 학회, "석궁재판은 위법"(국제신문, 2012.3.25)- 한남대 법학과 조현욱

박훈(김명호 교수 담당 변호사)

I. 은폐되어야 하는 진실

2007. 1. 15. 18:30 김명호는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의 집 앞에 있었다. 그는 부장판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석궁을 든 채. 그리고 한 시간 후 언론에 긴급 속보가 타전되기 시작하였다.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석궁에 맞아 중상” “석궁테러” 그날 방송사의 뉴스 첫 머리는 바로 이 사건이었고 한참 동안 세간의 주목을 받는 사건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제1심과 항소심에서 모두 4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현재 대법원에 상고 중에 있다.

나도 그때 그 소식을 들었다. 나의 첫 반응은 “올 것이 왔다.”였다. 그리고 두 번째 드는 생각은 “변론을 자청할까 아니면 어떻게 할까.”였다. 상대가 무시무시하였다.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자리는 법원 판사라면 모두가 다 선망하는 자리이고 그 정도까지만 이르러도 가문의 영광이 되는 자리였다. 난 이 사건 이전에 교수들 사건을 꽤나 변론을 하였다. 개별적인 사건보다는 집단적인 사립학교 민주화 투쟁에 더 열심히 이었다. 난 개별적인 교수들 사건에서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파편화된 교수들은 그것을 온전히 자신의 문제로만 인식하고 그 한도 내에서만 해결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교수 재임용제도, 사립학교의 족벌 문제, 사립학교법 등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 등한시하는 아집에 사로잡힌 교수들을 많이 보았다. 김명호 교수도 그런 분들 중의 한 분이 아닐까 생각해서 선뜻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내가 창원에서 일하고 있어 구속 사건을 담당하기도 어려운 현실적인 조건이 있었다. 그래서 사건 초기에 가족들로부터 선임 의뢰를 받았지만 내가 몸담고 있는 사무실의 서울 변호사들을 알려 주는 것으로 일단을 지었지만 다른 변호사들이 선임되었다. 그러나 언론의 사건 보도에 대해서는 내가 읽고 보는 한에서는 주의 깊게 보고 있었다.

제1심 공판 과정 중 제7차 공판은 이 사건의 분수령이었다. 피해자로 자처하는 부장판사가 증언을 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처음으로 제1심 변호인과 김명호 교수는 증거로 제출된 옷가지를 볼 수가 있었다. 와이셔츠에 혈흔이 없는 것이 그때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다. 그리고 부러진 화살이 왜 사라졌는지도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8차 공판부터는 김명호 교수가 재판을 거부하기 시작하였고 제9차와 선고기일까지 그 상태는 그대로 지속되었다. 그리고 김명호 교수의 단식 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하였다. 그 무렵이었다. 나한테 난데없이 법원으로부터 김명호 교수에 대한 변호인 선임의뢰서 통지가 왔다. 형사소송법에 그런 조문이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법원으로부터 선임의뢰서가 통지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고 난 여태까지 변호사 생활을 하는 동안 본적도 없고 들어 본적도 없었다. 고민이 시작되었다. 이토록 선임을 원하는데 선임을 하여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대법원 사건 검색에 들어가 보았다. 참 할 말을 잃었다. 수많은 보석 신청, 증거보전 신청, 기피신청 거기에 항고, 재항고. 그런 사건 기록을 갖고 있는 것은 처음 보았다. 아마도 전무후무한 기록이 아닐까 싶었다. 여하튼 만나서 이야기를 하기로 하였다. 1박 2일의 접견을 시작하였다. 서로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난 이야기 과정에서 김명호 교수의 생각에 거의 동의하였다. 특히나 “나보고 반성해라. 타협해라 하지 마라. 난 죽어도 그럴 생각이 없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것에 완전히 동의하였다. 난 사람이 어떤 신념에 의해 어떤 행동을 하였다면 절대로 반성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것이 양심범의 첫째 조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법이 양심을 옥죄어 온다면 맞서 싸워야 할 뿐이다. 법이 그 양심을 처벌해도 굽혀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신념이다.

그 다음날로 선임서를 제출하고 기록 복사를 하였다. 난 사건이 단순해서 기록 양이 얼마 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엄청났다. 단순한 사건치고는 방대한 양이었다. 수사기록만 2,500페이지, 공판 기록만 2,000페이지를 넘었다. 특히 난 공판기록이 그렇게 방대한 것은 처음 보았다. 모든 공판과정이 하나하나 담겨져 있는 공판기록이었다. 김명호 교수가 변론 녹음 신청을 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난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변론 녹음 신청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런 경험을 가진 변호사도 없을 것이다.

형사소송에서는 항소이유서를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항소기각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제1심 판결문에 내가 변호인으로 나오지만 난 한 번도 제1심 판결에 관여한 적이 없다. 김명호 교수가 선고 전에 모든 변호인을 해임하고 내가 선고 전에 선임서를 제출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지만 사실 이것은 위법이었다. 하여간 기록을 검토하면서 항소 이유서를 써야 하는데 항소 이유서 제출 기간을 지나지도 않았는데 느닷없이 항소심 제1차 공판 기일 통지를 하여왔다. 물론 재판에 참여하지 않았다. 기록을 검토하면서 항소 이유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난 이 재판의 수 많은 문제점들을 단숨에 알아낼 수가 있었다.

무엇인가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피해자라고 자처하는 판사의 진술과 증언은 횡설 수설 그 자체였다. 도무지 신빙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모든 증거는 피해자의 복부에 화살이 박히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남는 것 그렇다면 도대체 그 상처는 어떻게 해서 난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설마 부장판사가 자해를 하였을까. 그 정도라는 말인가. 참 많은 불면의 밤을 새웠다. 이제 김명호 교수가 석궁을 들고 부장판사 집에 갔다는 것은 나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부장판사와 경찰과 검찰이 사건을 조작하였다는 것에만 나의 초점이 모여졌다. 왜 그들은 사건을 조작하였을까. 그렇다. 부장판사가 거짓말을 하였기 때문이고 대법원이 사건 초기에 벌써부터 이 사건을 엄단하겠다고 하였으니 진실은 반드시 은폐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제 그들과의 투쟁은 불가피하였고 그들은 폭력과 침묵으로 이에 맞섰다.

. 폭력의 재판.

형사재판 과정은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여 피고인의 유무죄를 따지는 과정이고 그 과정에서 피고인에 대한 적정한 양형을 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피고인 김명호에 대한 이른바 “석궁테러” 형사 재판 과정은 실체적 진실을 발견해 나아가는 과정이기는 커녕 진실을 어떻게 하면 덮을 수 있을까를 노심초사 고민하는 폭력의 장이었다.

제1심에서 김명호는 감치 재판을 2번이나 받았다. 한 번은 “재판이 개판이다.”라는 말을 하였다는 이유로 또 한 번은 재판장이라 하지 않고 이름을 불렀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방청객이 김명호에 대한 감치 재판에 항의하여 “아 너무합니다.”라는 말을 하였다는 이유로 감치를 받았다. 나아가 항소심에 마지막 공판 과정에서 재판장이 피고인과 변호인의 모든 증거 신청을 일괄적으로 기각하고 재판을 강압적으로 끝내자 법정을 향해 계란 2개를 던졌다고 감치 재판을 하였다. 방청객에게 제1심과 항소심의 재판장은 아무 소리도 못하게 하였다.

제1심 재판장에 대한 기피신청은 항고와 재항고를 거듭하여 무려 110일 동안 재판이 공전되었다. 참고로 재판장에 대한 기피신청이 우리나라 사법부에서 받아들여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항소심에서는 재판장에 대한 기피신청을 강압적으로 끝낸 마지막 재판기일에 하였지만 “소송 지연 목적”이라고 그 자리에서 기각결정하고 결심을 하였다. 또한 김명호 교수는 제1심에서 2번의 퇴정을 하고 끝내 8차 공판부터는 재판을 거부하였다. 항소심에서는 마지막 공판기일에 변호인과 피고인이 같이 퇴정하였다.

난 이런 재판을 진행하면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이토록 황당하다 못해 비참한 재판을 진행할 수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법부는 이 사건에 대해 아무런 실체적 진실을 밝히려고 하지 않고 오로지 피고인의 유죄만을 주장하는 재판을 노골적으로 진행하였다. 이 사건 피해자라고 자처하는 서울고등법원 부장 판사 박홍우의 거짓말을 덮어 버리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사법부의 고위 법관이 있지도 않은 사실을 언론에 이야기하고, 이로 인해 이 사건은 일명 “석궁 테러”로 불리어졌으나 이제 사건의 진실은 박홍우 판사에 의한 “사법 테러”로 밝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진실하여야 할 고위 법관이 거짓으로 사건을 부풀리고 증거조작에 가담한 흔적이 짙은 이 사건은 그것 자체로서 사법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사법부가 기를 쓰고 이를 은폐하려고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항소심 재판을 진행하면서 이러한 사법부의 의도는 더욱 극명하게 나타났다. 검찰이 피해자 박홍우의 옷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양복 등의 옷가지에 묻은 혈흔이 과연 박홍우의 혈흔인지 아닌지에 대해 감정을 하자고 여러 차례 피고인측이 신청을 하였으나 재판부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기각하였고, 박홍우의 옷가지라고 주장하는 옷을 누가 수거해 갔는지에 대하여 사실 조회를 했으나 검찰과 송파경찰서는 모른다고 답변하였으며, 이에 대해 재판부는 아무런 문제도 삼지 않았다. (사건 당일 박홍우 판사는 집으로 올라가 양복을 완전히 갈아입고 폴라티를 입은 평상복 차림으로 병원에 갔다.)

박홍우 판사의 상처가 과연 석궁에 의해 발생할 수가 있는 상처인지 석궁 실험을 통해 진실을 규명해 보자고 줄기차게 신청을 하였지만 역시 아무런 이유도 없이 기각하였다. 더 나아가 이 사건의 유일한 증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박홍우 판사의 증언이 횡설수설하여 그 진위를 다시 따져 보기 위해 증인 신청을 계속 하였으나 이것 역시 아무런 이유도 대지 않고 기각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또 다른 공소사실인 고위 법관들에 대한 명예훼손 사건에 대해 피해자로 지목되고 있는 고위 법관들에 대한 증인 신청과 처벌 의사 여부에 대한 사실조회 신청조차도 기각하였다. 고위 법관들은 법 위에 군림하는 사람들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나아가 검찰측에 당시 사건 현장에 있었던 “부러진 화살”의 존재 여부와 행방에 대해 밝혀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역시 밝히지 않았고 오히려 재판부는 “모른다고 하지 않은가”라고 대신 답변하는 어처구니없는 행태를 보였다. 그 이외에 검찰 측에 박홍우 판사가 어떻게 어디에서 화살에 맞았다고 보는지, 중간에 입은 와이셔츠에는 왜 혈흔이 없는지, 양복 등에 묻은 피가 박홍우의 혈흔이라고 보는지, 석궁과 화살 등에 대한 적법한 압수 수색 영장이 있었는지, 피해자 박홍우의 진술 번복의 동기가 무엇인지 등에 대하여 입장 표명할 것을 요구 하였으나 재판부는 검찰측이 모른다고 하거나 궤변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을 감싸는데 급급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참한 폭력적 재판을 감추기 위해서 새로 재판을 맡은 재판장 신태길은 (항소심을 처음 맡았던 재판장은 3회까지 공판을 진행하고는 갑자기 사직하였다.) 기습적으로 녹음, 녹취도 하지 않았고, 속기록도 공개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1심부터 항소심의 재판장이 신태길로 바뀌기 전까지는 모든 재판과정들이 녹취록으로 공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폭력적 재판의 최일선으로 뛰어든 재판장 신태길은 모든 것을 비공개로 하였다. 이것은 폭력적일 뿐만 아니라 코메디인 이 재판이 공개되는 것을 두려워 한 야비한 조치일 뿐이었다. 그리고 강제적으로 변론을 종결했다. 신성해야 할 재판정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계란이 날아가고 고함이 오가고, 피고인과 변호인이 항의 표시로 퇴정하고.....

이것이 과연 문명사회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재판이란 말인가. 분명히 말하지만 테러를 한 것은 피고인이 아니라 사법부였다. 재판테러 말이다. 이 사건이 발생한 직후 실체적인 진실이 밝혀지기도 전인 2007. 1. 19. 전국 법원장 회의에서 이 사건에 대해 “사법부에 대한 테러”로 규정하고 “엄단”하겠다는 의사 표현을 분명하게 하였다. 재판의 공정성은 법관의 “예단 배제”에 있다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것이다. 그리고 헌법과 형사소송법에도 “무죄 추정 원칙”을 명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법부의 수장들이 이미 이 사건에 대해 유죄의 심증을 가지고 엄단하겠다고 하였으니, 이 사건에 대해 어찌 우리나라 사법부가 공정한 재판을 할 수가 있겠는가. 이미 사법부는 이 사건에 대해 재판을 할 자격을 상실하였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2008. 3. 7. 전국 수석 부장판사 회의를 열어 역시 이 사건을 사법부에 대한 테러로 재규정하고 또 엄단하겠다고 하였다. 이러한 것이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사건에 대해 사법부가 할 수가 있는 짓인지 알 수가 없다. 사법부는 이미 사법부가 아니었고 “신성한” 법정은 시정잡배들이 폭력을 휘두르는 추악한 장소보다 더 못한 곳이었다. 그곳은 법정이 아니었다.



. 판결의 위법성에 대해.

1. 필요적 변호 사건에서 소송절차를 위반한 사건의 판결은 파기환송 되어야 한다.
항소심은 제1심이 필요적 변호 사건임이 명백한 이 사건에 대해 제1심 8차 공판기일과 9차 공판 기일에 변호인 없이 개정을 한 다음 증거조사를 실시하여 이를 유죄의 증거로 삼은 것은 제1심 소송 절차가 법령에 위반되었다는 것은 인정하였으나, 제1심 판결에 대해 파기 환송을 하지 않고 파기 자판을 하는 위법을 저질렀다.

피고인은 항소이유서에서 형사소송법 제282조가 필요적 변호 사건에서는 “변호인 없이 개정하지 못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음으로 이를 무시하고 개정하여 이에 터 잡아 판결을 선고하는 경우 이는 판결 자체가 “무효”임으로 이 사건은 여전히 제1심에 있는 관계로 파기 환송하여야 한다고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이점에 대해 원심은 단지 소송절차가 위법하다는 것만을 인정하였을 뿐이고 그래서 어떤 법률상 효과를 초래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판단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러한 소송절차의 법 위반에 대해 형사소송법은 파기 환송 규정을 두고 있지 않으나, 피고인의 방어권이 침해되는 재판을 막기 위해 필요적 변호 사건과 국선변호인 선정을 두고 있는 입법 취지에 비추어 볼 때 이 사건은 여전히 제1심에 계속되어 있는 사건으로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지 않고 필요적 변호 사건의 소송 절차 위반이 단지 항소 이유가 될 뿐이고 그런 절차 위배가 있다고 한다하더라도 항소심에서 진행하면 그만이다고 한다면 형사소송법의 위 규정들은 아무런 쓸데가 없는 규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필요적 변호 사건임에도 재판장이 공소사실의 범죄 사실을 오해하여 필요적 변호 사건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계속적으로 변호인 없이 재판을 한 사건에 대해 단지 항소 이유로 삼을 수 있다고 한다면, 이는 제1심 공판이 없는 무효인 원심 선고를 두고 항소심에서 판단하는 것으로서 피고인의 심급의 이익을 박탈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현재까지도 제1심에서 변론 종결이 되지 않은 사건이어서 항소할 원심 재판이 있다고 할 수 없었음으로 당연히 항소심으로서는 파기 환송하여 제1심에서 모든 절차를 거치도록 하는 것이 형사소송법의 입법 취지와 헌법 12조 제1항의 “적법 절차”를 정하고 있는 것에 부합하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형사소송법 제366조는 항소심의 파기 환송 범위를 공소기각 또는 관할 위반의 재판이 법률에 위반됨을 이유로 한 경우에만 정하고 있으나 이는 헌법 제12조 제1항의 적법 절차 규정을 무시하고 있는 것으로 파기 환송의 범위에는 형사소송법 제282조의 필요적 변호 사건을 지키지 않고 위법하게 법정을 개정하고 진행한 사건도 당연히 포함되어야 할 것인데 이점을 정하고 있는지 않는 것은 위헌 규정이라 할 것이다. 변호인은 이점에 대해 대법원에 이 사건을 상고하면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하였다.

2. 항소심 판시 범죄 사실 제2항 공소사실에 대한 채증법칙 위반, 심리미진, 사실 오인 및 법리 오해에 대하여

가. 항소심 판시 범죄 사실 제2항의
피고인이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인 피해자 박홍우의 판결에 불만을 품고 보복을 하기 위해 치밀한 준비를 한 다음, 피해자에게 석궁에 장전된 화살 1발을 발사하여 약 3주 정도의 치료를 요하는 복부의 근육층까지 침투한 창상, 오른쪽 팔꿈치의 열상, 오른쪽 옆구리의 둔상 등 상해를 가하고 석궁을 허가받은 용도 외로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공소사실 요지.

나. 심리미진의 점에 대해.
형사소송법 제364조 제2항은 항소법원은 판결에 영향을 미친 사유에 관해서는 항소이유서에 포함되지 아니한 경우에도 직권으로 심판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고, 형사소송법 제370조에 따라 준용되고 있는 형사소송법 제2편 공판에 관한 규정 중 형사소송법 제291조의 제2항에서 정하고 있는 바와 같이 법원은 직권으로 증거 조사를 할 수 있도록 하고있다.

이는 형사소송법이 당사자주의에 치우치지 않고 법원의 직권 증거 조사 주의 채택하여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는데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는 것을 정하고 있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항소심은 직권 증거 조사는커녕 피고인측의 합리적인 증거 신청에 대해서 어떤 이유도 없이 기각 결정을 하는 따위의 아무런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재판을 진행하였다. 이는 심리미진을 넘어서 범죄행위를 은폐시키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먼저 피고인측은 피해자라고 자처하는 박홍우의 옷가지에 묻은 혈흔이 박홍우의 혈흔인지 아닌지에 대해 검증하자고 원심 제2회 공판기일부터 제5회 공판기일까지 일관되게 신청을 하였으나 아무런 이유도 없이 계속적으로 기각결정을 하였다. 심지어 제2회 공판기일에서 원심 재판장 이회기는 “피해자와 동일한 사람피로 판명나면 공소사실을 인정하겠냐.”는 황당하다 못해 웃기지도 않는 말을 하였고 결국 제3회 공판기일에서 “피해자 혈액을 어떻게 확보 하냐고.” 하면서 “적절하지 않기 때문에 기각한다.”라고 하였다. (이상 제2회 및 제3회 공판조서 참조)

박홍우의 옷가지라고 주장되고 있는 옷가지에 묻은 혈흔이 누구의 피 인가는 매우 중요한 기초적인 진실의 출발점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서 (수사기록 1865쪽 이하)에는 옷가지에 묻은 혈흔은 단지 남성의 혈흔이라고 되어 있을 뿐이고 그 남성이 누구인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 남성이 누구인지 즉 피해자 박홍우인지를 확인하자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증거 신청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기각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 피해자로 자처하는 박홍우의 상처는 석궁에 의해서는 도저히 발생할 수가 없는 상처였다. 그래서 이점에 대해 피고인측은 다양한 상황에서 석궁실험을 하여 어떤 상황에서 그런 상처가 발생할 수가 있는지에 대해 검증신청을 하였으나 이에 대해서도 역시 아무런 이유도 없이 기각 결정을 하였다. 송파경찰서가 석궁 실험을 한 수사보고서 (수사기록 제429쪽 이하)에 의하면 석궁의 위력은 매우 커서 정면으로 쏜 경우 거리가 0미터인 경우에도 돼지고지 15㎝와 의류를 완전 관통하여 돼지고기에 깊숙하게 박히거나 완전하게 장전되지 않는 경우에는 의류 자체도 관통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 사건의 경우는 양복을 모두 뚫고서도 겨우 지름 0.5㎝ 내지 2㎝ (증인 고00과 권00은 0.5㎝라고 하고 있고 증인 박00는 2㎝라하고 있음) 상처 깊이는 모르는 정도의 상처가 발생한다는 것은 도저히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항소심으로서 마땅히 이점에 대해 실험을 통한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노력을 하여야 했으나 역시 아무런 이유도 없이 피고인측 증거신청을 기각하여 심리를 다하지 않았다.

더 중요하게는 이 사건의 유일한 증인인 피해자로 자처하는 박홍우를 다시 불러 진술 번복의 동기와 피해자의 옷가지로 추정되는 옷의 화살 관통 구멍으로 추정되는 곳과 상처 부위를 맞추어 보아야기 하기 때문에 박홍우를 증인 신청하였으나 제1심에서 검찰측 증인으로 나왔다는 이유로 만으로 증인 신청을 기각하였다. 박홍우의 증언이나 진술은 뒤에서 자세히 보는 바와 같이 전혀 신빙할 수가 없었다.

박홍우는 진술 번복 동기를 “의사가 상처의 방향이 위에서 아래의 방향이라고 해서 처음에 그렇게 진술을 하였지만 나중에 홍00 경찰관이 와서 자기에게 말하기를 의사가 그러든데 상처의 방향은 박힌 화살을 어떤 방향으로 뽑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을 듣고는 모든 기억이 없어져 진술을 번복하게 되었다”고 하였고 하였다. 그러나 화살 방향에 대해 박홍우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의사는 단 한사람도 없었고, 홍00은 항소심 제3회 공판기일에 증인으로 나와 “박홍우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전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항소심에서 새롭게 밝혀진 사실에 터 잡아 박홍우를 다시 증인으로 불러 진술 번복의 동기를 추궁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절차였다. 나아가 제1심에서 박홍우에 대한 피고인 반대신문은 당시 재판장 이였던 김용호의 적극적인 저지로 충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김용호 판사는 박홍우가 검찰측 증인이라는 이유로 주 신문에 한정하여 반대 신문할 것을 여러 차례 강압적으로 말하였고 실제로 그렇게 증인 신문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피해자 옷가지로 추정되는 옷가지의 구멍과 상처 부위에 대한 검증도 이루어지지 않아 이를 확인하고자 이 사건에서 매우 중요한 증인인 박홍우에 대해 다시 증인신청 하였음에도 역시 합리적인 이유 없이 증인 신청을 기각함으로서 항소심은 이 사건 실체적 진실 발견을 위한 심리를 아무것도 진행하지 않았다.

형사소송법규칙 제141조 제1항은 재판장의 석명권을 규정하고 있다. 이는 실체적 진실 발견을 위해 재판장의 임무를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항소심은 아무런 석명권 행사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피고인측이 요구한 석명권 발문 요구에 대해서도 전혀 응하지 않았습니다. 피고인측은 항소심 재판장이 석명권을 행사하지 않자 석명권 발문 요구를 하였고 그 내용은 “부러진 화살의 존재 여부, 부러진 화살이 어디로 갔는지, 박훙우가 입었던 조끼와 내복 사에는 혈흔이 있는데 와이셔츠에는 혈흔이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따위에 대해 석명권을 행사할 것을 요구하였고 나아가 “피해자 박홍우의 옷가지를 누가 수거하였는지”를 물었으나 검찰측의 “모른다.”라는 답변을 전하는 것 이외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말해 이 사건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려는 행위는 그 어떤 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실체적 진실을 감추는 재판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심리미진를 넘어서 이것 자체로서 범죄행위를 저지른 재판과정이었다.

다. 위법수집 증거의 증거채택.
형사소송법 제308조의 2는 적법한 절차에 따르지 아니하고 수집한 증거는 증거로 할 수 없다라고 규정하고 있고 이는 신설된 규정이지만 형사소송법 부칙 제1조에 의해 이 사건에 적용되고 있는 조항이다.

그런데 항소심은 판결문에서 제1심 판결의 증거를 그대로 채택하고 있는데 제1심 판결에서 증거로 채택하고 있는 증거 중 “석궁, 화살3촉, 석궁가방, 화살6촉, 회칼, 다다미판”은 압수 수색 영장 없이 압수된 물건으로서 증거 능력이 전혀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석궁은 수리된 상태여서 변조된 증거물이었다.

현행범인으로 체포하였다 하더라도 압수한 물건에 대해서는 형사소송법 제217조 제2항에 따라 48시간 이내에 압수 수색 영장을 발부받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피고인이 임의로 제출한 것도 아니고 (피고인은 임의성을 부인하였다.) 유류한 물건은 더욱이 아니었다. (석궁가방과 화살 6촉, 회칼은 피고인이 현행범인으로 체포된 장소에 있었던 것인데 이를 유류한 물건이라고 하는 것은 성립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적법 절차에 의한 압수 수색 영장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은 명확한 것이었다.

더구나 석궁가방, 화살 6촉, 회칼은 압수조서도 제출되지 않았고 석궁과 화살 3촉에 대한 압수조서는 조서 작성자로 되어 있었던 안00이 “자신이 작성한 것이 아니다.” 라고 항소심에서 명확하게 증언하고 있는 허위 공문서였다. 또한 다다미판은 피고인의 집에서 압수한 것으로서 아무런 압수 수색영장 없이 제출된 증거물이었다.

압수수색 영장 없이 압수된 증거물은 적법절차를 위반한 것으로 위법 수집 증거에 해당함은 그 누구의 눈에도 명확한 것임이었음에도 이점에 대해 항소심은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은 채 증거로 채택하여 피고인에게 유죄를 인정하였다.

나아가 석궁 자체가 수리되어 증거가 변조되었다는 것은 제1심 증인 고00과 김00에 의해 명확하게 밝혀진바 있음으로 이것 자체로도 증거로 사용할 수가 없다는 것은 명확한 것이었다. 형상과 기능이 완전히 달라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항소심이 위와 같은 증거를 채택한 것은 형사소송법 제308조의 2가 정하고 있는 위법수집증거 배제 법칙을 정면으로 어기는 것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점에 대해 종전의 대법원 판례를 들어 처벌의 형평성 운운하며 피고인의 주장을 배척할는지 모르나 이는 형사소송법이 위 신설조문을 개정하지 전의 판례임으로 판례가 법률보다 위에 있을 수는 없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위법하게 수집한 증거는 그 자체로서 다른 모든 것을 고려할 것 없이 엄격하게 지켜져야 할 것이다. 더구나 이 사안은 압수 수색 영장 없는 강제처분을 불허하고 있는 헌법과 형사소송법을 정면으로 위배한 사건으로서 이를 달리 판단할 근거는 전혀 없다고 할 것이다. 대법원이 법을 창조하는 판례 행위는 더 이상 존재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라. 채증법칙 위반에 대해.
형사소송법 제307조는 “사실 인정은 증거에 의하여야 한다.” 한다고 정하고 있으며 엄격한 증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형사소송법의 대원칙으로 서 절대적으로 엄격하게 지켜져야 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것입니다. 나아가, 형사소송법 제308조는 법관의 자유 심증에 의한 증거 증명력을 규정하고 있지만, 이는 “형사재판에 있어서 유죄의 인정은 법관으로 하여금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공소사실이 진실한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할 수 있는 증명력을 가진 증거에 의하여야 하고 이러한 정도의 심증을 형성하는 증거가 없다면 설령 피고인에게 유죄의 의심이 간다 하더라도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대법원 2006. 4. 27. 선고 2006도 735 판결, 2003. 2. 11. 선고 2002도 6110 판결, 2000. 2. 25. 선고 99도4305 판결 등등)는 제약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즉 사실 인정은 통상인이면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정도의 보편타당성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항소심이 무슨 증거로 위와 같은 공소사실 전부 인정하였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을 정도로 완전히 채증법칙을 위반한 황당한 판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 피해자 박홍우의 일관성 없는 진술 문제에 대해.
이 사건의 피해자이면서 핵심적인 증인인 박홍우의 진술은 이 사건 전체를 좌지우지 할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다. 이 사건에서 핵심적인 증인의 진술과 증언은 그것이 일관 되어야하고 구체적인 것이어야만 신빙성이 있다고 할 것이다.

대법원은 증언의 신빙성 문제에 대해 “증인의 증언에 의하여 그 진정성립을 인정하는 경우 그 신빙성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서는 증언 내용의 합리성, 증인의 증언 태도, 다른 증거와의 합치 여부, 증인의 사건에 대한 이해관계, 당사자와의 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야 할 것이다”(대법원 1994. 10. 11. 선고 94다23746 판결, 1992. 1. 21. 선고 91다22643 판결, 1999. 4. 9. 선고 98다57198 판결)라 하고 있으며, “이 사건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피해자 안00의 진술은 그가 피고인과 상반되는 이해관계를 갖는 자로서 그 자신이 이 사건 사고당시 오토바이를 운전하였다고 자인하였다가 번복한 일이 있어 이 사건 오토바이를 전혀 운전한 일이 없다고 하는 피고인의 일관된 진술에 비추어 믿을 수 없고, 경찰, 검찰, 제1심 법정 등에서 단계적으로 진술내용이 불어나면서 합리화되어 가고 있는 목격 증인 박00의 진술내용도 신빙성이 없다”(대법원 1983. 9. 27. 선고 83도977 판결)라 하여, 진술을 번복하는 경우에 있어서 증인의 증언에 대한 신빙성을 더욱 엄격하게 따질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피해자 박홍우의 이 사건 진술 및 증언은 사건의 피해자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횡설수설 하고 있으며 진술의 번복과정도 전혀 이치에 맞지 않았다. 이에 반해 피고인은 최초 경찰 진술부터 현재 법정에 이르기까지 “화살을 발사 한 적 없다”고 일관되게 진술하면서, 석궁을 든 상태로 박홍우와 서로 실랑이를 벌이는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화살이 나갔는데, 화살이 박홍우에 맞지 않았다고 매우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다.

그에 반해 박홍우는 사건 당일인 2007. 1. 15. 서울대병원 병실에서 작성된 최초 경찰 진술조서에서 “피고인이 우측 계단 3-4개 중간에서 박홍우 판사라고 부르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1.5m에서 거리에서 조준하여 석궁 화살을 발사하였고 화살을 복부에 맞은 상태에서 김명호를 잡아 주변에 사람이 없기 때문에 밖으로 끌고 나가려고 하다가 둘이 같이 계단에서 넘어지게 되었다.” (수사기록 제33쪽부터 제36쪽)라고 진술을 하였고, 이어 그 다음 날인 같은 달 16. 서울 대학교 병실에서 작성된 제2차 경찰 진술조서에도 “대략 1.5m 거리에서 계단에서 조준하여 석궁을 앞으로 내밀면서 나를 쏘았다. 화살을 맞고 김명호가 가지고 있는 석궁을 잡으면서 바닥에 김명호와 넘어졌다.” (수사기록 186쪽부터 189쪽)고 하여 최초 진술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건 일로부터 10일이 지난 같은 달 25. 서울대학교 병원 12206호실에서 작성된 검사작성 진술조서부터는 갑자기 말을 바꾸기 시작한다.. “피의자가 계단을 내려오면서 언제 저에게 석궁 1발을 쏘았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1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피의자와 실랑이를 벌이려고 하는 순간 무렵에 내 복부에 화살이 꽂혀 있는 것을 확인하고 왼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왼손인지 오른손인지 붙잡고 화살을 뽑은 다음 피의자를 붙잡고 밖으로 끌로 나가기 위해 실랑이를 벌이다가 현관 입구 계단에서 피의자와 함께 넘어졌다. 화살을 뽑은 다음 나중에 바닥에 화살이 부러진 상태로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 화살을 경비원에게 주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수사기록 제673쪽부터 678쪽까지)고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박홍우의 진술 변경에 대해서 검찰이 2007. 2. 2. 제2차 진술 조서를 받는 과정에서 추궁을 하자 박홍우는 더욱 뚜렷하게 “그것이 흉기라고 생각하고 사용하지 못하게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는 것까지는 기억이 나고 그 다음 상황은 확실히 기억이 나지 않으나, 어쨌든 그 직후에 김명호가 계단을 내려왔는지 제 앞 약 70cm 미터 내지 1m 정도 전방의 거리에 있었고, 그 순간 제 왼쪽 배에 화살이 꽂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화살을 뽑고 나서, 그 후에는 제가 그 사람을 밖으로 끄집어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누가 먼저 잡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서로 옷을 잡을 기억이 난다. 언제 어느 지점에서 저에게 석궁을 쏘았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저와 김명호가 함께 현관 바닥에 서 있을 때 복부에 화살이 꽂혀 있는 것을 확인했다. 화살을 뽑은 이후에야 서로 간에 몸싸움이 있었던 같다. 화살을 뺄 때에는 안 부러졌던 것이 확실하다. 아마도 서로 간의 몸싸움 과정에서 같이 넘어지면서 부러졌는지 모르겠다. 피의자가 석궁을 쏜 후 먼저 진술인에게 달려든 것인지 아닌지 시간적 선후 관계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다. 김명호가 목 부분을 눌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고 다만 그 순간 저의 생각으로는 김명호가 저의 목을 눌러서 죽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화살은 제가 뽑은 다음 주위에 떨어뜨렸던 것 같고 활은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수사기록 1894쪽부터 1908쪽까지)고 진술하여 거의 모든 부분에 대해 “기억이 없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러한 진술 변경은 2007. 8. 28.에 개정된 제1심 제7회 공판 증언에서 더욱 기억이 없는 것으로 진전된다.. 박홍우의 증언을 관련된 부분만을 요약하면 “어느 순간에 제가 101호 라인쪽으로 몸이 밀려와 있었고 그 순간에 피고인이 내 앞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느 시점에 어떻게 피고인이 계단 위에서 엘리베이터 앞쪽에 현관 쪽으로 내려왔는지 전혀 기억을 못한다. 그리고 피고인이 내 앞에 서 있었고 그런 상태에서 내가 화살에 맞은 것을 순간적으로 발견하고 내가 화살을 뺐다. 내가 몸을 일으켜 세울 무렵에 내가 화살을 하나 잡았다. 화살은 부러져 있었다. 그 화살을 내가 경비아저씨한테 드렸을 것이다. 화살을 뽑은 후에 피고인의 앞 부분을 세게 잡았는데 잡기 직전에 피고인의 왼팔쪽 어디를 내가 잡았지 않았나 싶은 데 잡은 것이 화살을 뽑기 전인지 후인지 그게 기억이 흐릿하다.” (증인 박홍우의 증인신문조서)

이러한 피해자의 진술 변경은 이 사건 내용을 근본부터 뒤흔드는 매우 중대한 진술이었다. 피고인은 초지일관 피고인과 피해자 박홍우가 석궁을 잡으면서 실랑이를 하는 과정에서 화살이 우발적으로 발사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었는데 반해, 피해자 박홍우는 처음에는 조준해서 발사하였다고 진술을 하였다. 이는 형법상 고의범인가 아닌가를 가리는 매우 중대한 법률적 차이를 가져오는 것으로서 그 차이는 대단히 중차대한 것이었다.

이러한 점을 25년의 판사 경력을 가진 박홍우가 모른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박홍우는 중대한 사실 부분에서 “계단에서 1.5m 지점에서 조준해서 발사하였다”는 진술 부분을 “언제 어디에서 쏘았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고 진술을 바꾸고 “화살을 복부에 맞은 상태에서 김명호를 잡고 계단으로 넘어졌다.”는 부분을 “화살을 뽑은 다음”으로 완전히 바꾸고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기억이 없다고만 하고 있었다.

이는 박홍우의 진술을 전혀 신빙할 수가 없다는 점을 그대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건 당일 최초 진술은 매우 신빙성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 관계를 그대로 경험한 것을 진술할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초 진술에서는 3-4개 위쪽 계단에서 피해자와 1.5m 거리에서 조준해서 발사를 하였다고 하였다는 것을 나중에 언제 어느 지점에서 맞았는지 알 수가 없다라고 진술을 변경하였는데 이는 변경할 수가 있는 성질의 것이 전혀 아니었다. 그리고 피고인과 피해자의 거리에 대해서도 1.5m에서 70cm 또는 1m로 변경하더니 제1심 공판 증언에서는 “내 앞에서”라고 증언을 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점점 피고인과 피해자간의 거리가 좁혀졌고 종내에는 피고인이 말하는 바와 같이 서로 매우 근접해 붙어 있을 정도 거리에 있었음을 진술하였던 것이다.

화살을 맞은 시점에 대해서는 기억이 없다고 진술을 변경한 다음부터는 “화살 맞고”서 같이 계단에 넘어졌다는 것을 “화살을 뽑은 후” 같이 계단으로 넘어졌다라고 진술하였다. 그런데 이것 역시 진술을 번복할 수가 있는 성질의 것이 전혀 아니다.. 화살을 맞은 상태에서 피고인과 실랑이를 하고 계단으로 넘어졌다는 것과 화살을 뽑은 후 실랑이를 한 다음 계단으로 넘어졌다는 것은 몸에 상태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는 것으로서, 경험을 한 피해자로서는 도저히 달리 진술을 변경할 수조차도 없는 것이 일반인의 상식에 적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피해자 박홍우의 제2차 검사 진술 조서 작성과정에서 박홍우의 위와 같은 진술 태도에 대해 검사가 답답하다 못해 이렇게 물어왔을 정도입니다. “진술의 형식상 ‘모든 상황을 종합하면 그렇게 판단됨으로 그렇다.’ 라는 취지의 진술과 ‘직접 경험한 사실이 그렇다.’ 라는 취지의 진술은 굉장히 큰 차이가 있고 또 오랫동안 재판 업무를 한 진술인은 이러한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진술인은 경찰에서는 분명히 후자의 방식에 입각하여 피의자가 진술인을 향해 석궁을 조준하여 쏘았다고 사실을 경험한 것으로 분명히 진술하였으며 전자의 방식으로는 진술한 것이 아닌데 어떤가요.” (수사기록 제1910쪽)

이에 피해자 박홍우는 명확하게 경험하지 않았다는 진술을 하는데, “제가 목격했다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았고 또 그 당시에만 하여도 다른 가능성은 저로서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수사기록 제1910쪽)라고 하여 박홍우가 직접 경험하지 않는 사실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그대로 입증하고 있으며, 나아가 제1심의 제7회 공판기일 증언에 있어서도 다른 증인들과는 이례적으로 검사의 증인신문 도중 “피고인이 수사기관이나 법정에서 어떻게 진술했는지 그것을 좀 저한테 말씀해 주세요.”라고 2차례에 걸쳐 검사에게 요구하였다. (통상의 재판 과정이었으면 이러한 증인의 태도에 재판장은 버럭 화내면서 “증인이 경험한 것만 말하세요.”라고 할 것인데 이날 재판장은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피고인의 말만을 제지하는데 공판 과정 내내 모든 힘을 썼을 뿐이다.)

도대체가 증인이 자신의 경험만을 말하면 될 것이지 피고인이 무슨 진술을 하고 있는지 왜 알려고 하였을까 매우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는 태도였다. 이는 박홍우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홍우는 자기가 본 것을 이야기 하지 않았고 상황에 꿰맞추어 진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죽이나 답답했으면 검사가 진술조서를 받는 과정에서 “경험한 대로만 말하라”고 하였을까. 그리고 판사 경력 25년의 박홍우가 위에서 본바 같이 핵심적인 사실 관계에 대해 기억이 없다고 진술을 번복하면서 “화살이 박혔다. 화살을 뽑았다”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고 있다.

진술을 왜 변경하였는지에 대한 박홍우의 변명도 치졸함 그 자체였다. 박홍우는 진술을 바꾸는 동기에 대해 “병원에서 저의 복부 상처 방향이 위에서 아래쪽으로 비스듬히 났다고 하여 그렇게 진술하였는데 나중에 경찰관이 상처 방향은 화살을 뽑을 때 어떤 방향으로 뽑느냐에 따라 방향이 달라 질수 있다는 말을 해주어 피의자가 어느 지점에서 석궁을 쏜 것인지 단정하기 어렵다고 생각되고 저의 기억으로도 피의자가 어느 지점에서 석궁을 쏜 것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기” (검찰 1차 진술조서, 수사기록 제674쪽) 때문에 진술을 번복한다고 한 이래 “피의자가 계단위에서 활처럼 생긴 흉기를 들고 저를 찾아와 판결에 불만을 품은 말을 하고, 저의 복부에 석궁화살이 꽂혔던 것은 사실이고 병원의사 (어느 병원 어느 의사인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도 상처 방향이 위에서 아래쪽 비스듬히 났다고 하여 경찰에서는 그렇게 진술을 한 것인데, 경찰관 홍00이 방아쇠 당기는 것을 보았느냐고 묻기에 기억이 없다고 하면서 상처의 방향이 그러니까 위에서 아래로 쏘지 않았겠느냐 하니 그 경찰관이 의사에게서 확인을 했다고 상처 방향은 화살을 뽑는 과정에서 바뀔 수 있다고 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수사기록 1909쪽)라고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계단 위쪽 1.5m 지점에서 쏘았다고 최초에 진술한 것은 위에서 아래쪽으로 비스듬히 상처가 났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그렇게 추론해서 이야기를 하였는데 화살 방향을 뽑는 방향에 따라 상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모든 “기억이 없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홍우가 진술을 번복하게 된 동기 문제에 대해 위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홍00 경찰관은 항소심에서 증인으로 나와 “화살을 뽑는 방향에 대해 상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라는 말을 박홍우에게 한 적이 없다.”라고 명확하게 증언을 하였고, 검찰이 피해자의 상처 방향에 대한 진술을 청취한 수사보고서 (수사기록 1855쪽부터 1858쪽)에 의하면 서울대병원 의사 송00, 곽00, 박00는 아예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하고 있고 나아가 항소심 증인 의사 박00는 “상처방향이 위에서 아래쪽으로 비스듬히 났다라는 말을 한 사실이 없다.”라고 재차 확인하여 주고 있었다.

다시 말해 피해자 박홍우의 진술 번복 동기는 증거에 의해 아무런 근거가없다는 것이 명확하게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항소심으로 궤변을 통해 박홍우의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고 하였다.

항소심은 박홍우가 “석궁은 잡은 적이 없다”는 진술을 일관되게 하고 있었다고 하나 박홍우는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경찰 제2회 진술조서에서 “김명호가 가지고 있는 석궁을 잡으면서” (수사기록 제188쪽)라고 명확하게 진술한 적도 있었고, 피해자의 손에 상처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증명된 바도 없었음에도 이를 근거로 박홍우의 진술 신빙성을 인정하고 있고, 석궁 발사시 소음이 크지 않다고 하였는데 이는 제1심 제7회 공판기일 재판정에서 석궁 발사를 하였는데 그 소음이 매우 크다는 것이 입증된 것을 아무런 증거 없이 뒤집고 있는 등 항소심의 이유는 그것 자체로서 횡설 수설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무릇 재판은 모든 선입견을 배제하고 증거에 의해 재판을 하여야 한다는 것은 법조인이면 누구에게나 상식적인 것이고, 무죄 추정의 원칙이 있다는 것 역시 누구에게나 상식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 재판에서는 이런 상식이 전혀 통하지 않고 있었다. 왜, 피해자가 판사라서 그런 것일까. 피해자가 판사인 관계로 판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법원에 현저한 경험칙이 존재하는 것일까.

(2) 부러진 화살이 없어진 것은 이 사건이 증거 조작되었다는 것을 그대로 입증하는 것이다.
피해자 박홍우의 진술과 경비원 김덕환의 진술을 종합하여 보면 피해자 박홍우가 주장하는 “복부에 박힌 화살은 부러진 화살이었음이 분명하다.. 이 사건 당시 발사된 화살은 단 1개였다. 따라서 부러진 화살은 중대한 증거가 된다. 그런데 이 화살이 증발하였다.

경비원 김덕환은 이 사건 당일인 2007. 1. 15. 제1차 경찰 진술조서에서 “1층 현관에서 우당탕 하는 소리가 들려 올라갔는데 판사님과 어떤 남자가 서로 뒤엉켜 있다 일어난 상태였다. 석궁과 화살이 있어서 빼앗아 화단에 나두고 나니까 판사님이 몸에 박혔던 화살 1개를 주어 석궁을 놓아둔 곳에 두었다. 이때 판사남이 겉옷을 올려 보이면서 다쳤다고 말하여 보니까 와이셔츠 속에 피가 벌겋게 묻어 있었다. 범인이 석궁을 쏘는 것은 보지 못했다.”(수사기록 52쪽부터 54쪽)라고 진술하였고,

같은 달 29. 검사 작성 진술조서에서 “현관 입구 경비실 앞으로 올라와 보니 판사님과 김명호가 계단 밑에 넘어졌다가 옷을 붙잡고 있는 것을 보고 판사님 무슨 일이세요 하니 판사님이 이 사람 꽉 붙잡고 있어라 해서 김명호 앞쪽 혁대 부분을 붙잡고 손을 놓으라고 하면서 현관 밖 화단 쪽으로 2미터 정도 끌고 나왔는데 그때까지 김명호가 판사님의 옷을 붙잡고 있어서 김명호가 판사님을 붙잡고 있는 것을 떼어 내려고 하였으나 떼어 놓지를 못하고 있었는데, 그 순간 운전기사 문경석이 달려와서 김명호를 뒤에서 끌어안고 잡아당겨 떼어 놓았다. 자기와 문경석이가 김명호를 끌어안고 현관입구 5-6미터 떨어진 인도경계석에 김명호를 앉힌 다음 판사님쪽으로 가보니 판사님이 구부린 상태에서 왼손으로 왼쪽 옆구리를 붙잡고 있었는데 왼쪽 옆구리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 그때 판사님이 복부에 꽂힌 화살을 손으로 뽑아 저에게 주면서 화살을 갖고 있어라 하여 보니, 화살촉이 있는 앞부분만 남아 있고 화살 뒷부분이 없었다. 판사님이 상의를 위로 젖혀 올려 제가 보니까 와이셔츠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보았다. 운전기사가 저에게 김명호 허리춤에 화살이 2개가 더 있다고 하여 제가 김명호 허리춤에 있던 화살 2개를 빼내어 화단쪽으로 내려놓았다. 이미 화단에 석궁이 놓여 있어 그때 처음으로 석궁을 보게 되었다. 운전기사는 김명호를 붙잡고 있었고 저는 판사님 쪽으로 가서 다친 곳이 있는지 물어보고 판사님이 배에 꽂힌 화살촉을 뽑아 저에게 주면서 상의를 올려 피가 나는 것을 보고 제가 신고를 하였다.” (수사기록 제836쪽부터 제838쪽)

나아가 2007. 3. 21. 제1심의 제2차 공판기일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판사님이 옆구리에 손을 대고 있기에 ‘판사님 다치셨어요.’ 그러니까 작대기를 하나 주었다. 판사님을 옷을 들추니까 시뻘갰다. 화살촉이 뭉턱했다. 판사님이 그것을 쥐고 있는 것인지 거기서 뺀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증인에게 갖고 있으라고 주었다. (변호인이 ‘화살을 박 부장이 뺀 것이 맞나요.’라고 묻자) 옆구리에 갖고 있다가 주었다. (검사가 ‘증인이 볼 때 피해자가 화살을 옆구리에서 빼는 것을 보았나요 아니면 들고 있는 것을 보았나요’. 라고 질문하자) 들고 있는 것인지 뺀 것인지 모르겠다. 뒤에 날개 부분이 없었다. 그 당시에 이만치가 없었다. (변호인이 ‘박 판사님은 박판사님이 김명호 교수님과 서로 엉켜서 싸우기 전에 자신이 화살을 뽑아서 버렸다고 주장하는데 어떤가요’ 라고 묻자) 증인이 받아서 화단에 놓았는데 버렸다고 하면 말이 안 됩니다. 화살촉 2개랑 나머지 받은 화살촉이랑 다 모아서 한 곳 두었다. (판사가 ‘그 화살촉은 어떻게 경찰에 전달돼나요’라고 묻자) 석궁을 조그만 향나무 옆에다 놨기 때문에 화살을 빼내 가지고 거기다 같이 놨다. 그리고 판사님이 주신 부러진 화살도 거기다 갖다 놓았다. 그리고 112신고를 차가 와서 경찰을 불러다가 ‘증거물 여기 있습니다.’ 하고 경찰이 수거해 갔다.” (제2회 증인신문조서)라고 증언을 하였다.

즉 아파트 경비원 김00의 진술 및 증언에 의하면 당시 화단에 놓인 화살은 박홍우에게 받은 “화살촉 끝이 뭉특한 부러진 화살” 1개와 “김명호 허리춤에서 뺀 화살 2개” 도합하여 3개가 있었다는 것은 명확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 송00와 이00이 석궁과 같이 가져갔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송00는 2007. 1. 17. 경찰 진술조서에서 “이00 경사와 현장에 갔다. 피해자한테 다친 곳이 어디냐고 물어 보았고 피해자가 와이셔츠를 벌려서 보여주니 그때 보니 와이셔츠에 피가 묻어 있었다. 배꼽 우측 부분에 화살을 맞은 자국으로 상처가 나 있었다. 운전기사 우측편 화단 안쪽을 가리키면서 ‘저기 있어요.’ 말을 하여 제가 석궁과 화살촉 3개를 집어 들고 김명호한테 압수를 하겠다고 말을 하였다.”라고 진술하였고 (수사기록 298쪽부터 301쪽까지),

2007. 2. 1.자 검사 작성 진술 조서에서는 “그것이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여 석궁과 화살촉 3개만을 수거하였다.”(수사기록 1851쪽)라고 진술하였으며, 2007. 8. 14. 개정된 제1심의 제5회 공판기일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증언하기를 “석궁과 화살 3개를 지구대로 가져갔다. 누구한테 인계를 하였는지 모른다. 화살촉 3개가 다 비슷했다. 석궁케이스는 수거하지 않았고 석궁하고 화살촉 3개였다. 증인이 제일 먼저 현장에 갔다.”고 증언한 바 있다. (송00에 대한 증인신문조서)

그리고 2007. 1. 15. 자 작성된 석궁과 화살에 대한 압수조서 (수사기록 제11쪽부터 13쪽- 작성자 경위 안00, 참여자 경사 이00)에는 석궁과 크기가 같은 화살 3개가 있었다.

그리고 3개의 화살이 정말로 사건 현장에 있었던 것이고 그 중 1개의 화살이 박홍우의 복부에 박혀있던 것이라면 3개의 화살 중 하나에서는 확실하게 피해자 박홍우의 혈흔이 검출되어야 한다. 그러나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유전자 분석 감정서에 의하면 “증 8호 석궁 화살 3점”에서 혈흔 반응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수사기록 제1866쪽)

참 난감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현장에 있었던 화살은 3개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일치하는 진술이다. 그런데 도대체 부러진 화살은 언제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부러진 화살이 있었다면, 또 그것이 박홍우의 복부에 박힌 화살이었다고 하면 혈흔이 분명하게 남아 있어 이 사건을 좀 더 쉽게 판단할 수도 있을 것인데 도대체가 어디로 간 것인가. 박00, 김00은 부러진 화살이 있었다고 하고 송00와 이00은 화살 3개 중 특별히 다른 것이 없었다고 하고 있었다. 부러진 화살이 있었다면 송00와 이00이가 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따라서 송00와 이00이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수사기관이 증거를 조작하였다는 것 이외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경비원 김00의 증언은 신빙할 만하였다. 부러진 화살에 관한한 최초 진술부터 법정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진술 및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송00와 이00은 “모른다.”고 일관하고 있고 사건 당일 날 작성된 압수조서상의 사진에는 버젓이 정상적인 화살 3개가 사진으로 남아 있다. 이것은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다.

박홍우는 법률 전문가이다. 수많은 형사 사건을 다룬 판사이다. 그런데 그토록 중요한 화살의 행방에 대해 여전히 모른다고 하고 있고 경비원한테 주었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 분명 현장에는 단 3개의 화살만이 나왔다. 1개는 부러진 화살이고 2개는 정상적인 화살이었다. 그런데 당시 현장에서 압수한 화살은 3개는 맞으나 모두 정상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3개의 화살이 정말로 사건 현장에 있었던 것이고 그 중 1개의 화살이 박홍우의 복부에 박혀있던 것이라면 3개의 화살 중 하나에서는 확실하게 피해자 박홍우의 혈흔이 검출되어야 하는데 혈흔이 검출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런 사정이라면 수사기관이 증거 조작을 하였다는 것을 확신하지 않을 수가 없다. 혈흔이 뭍은 끝이 뭉특한 부러진 화살은 증거 조작을 할 수가 없는 것임에 반해 정상적인 화살은 석궁케이스에 들어 있던 화살7개에서 1개를 빼내면 쉽게 조작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찰, 검찰 수사과정에서 경찰과 검찰은 부러진 화살 행방을 찾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단 한군데 나온다. 2007. 2. 5.자 수사보고 (수사기록 제1950쪽)에 의하면 “피해자는 명확한 기억이 없다고 하고, 김00은 피의자와 몸싸움이 끝난 후 피해자 자신에게 화살을 교부하였는데 몸에 박힌 화살을 직접 빼서 자신에게 준 것인지는 정확히 보지 못했고 다만 구부린 상태에서 화살을 자신에게 교부한 것으로 기억한다. 문00은 피해자 경비원에게 화살을 교부하는 것을 보았다.”는 것 이외는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 이외는 직접적으로 단 한마디도 이 문제에 대해 그 누구에게 물어 본적도 없고 수사보고서를 작성한 적도 없었다. 이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한 수사일까. 절대로 상식적으로 가능한 수사가 아니었다. 매우 중대한 증거물인데 이것을 찾으려는 노력을 아예 하지 않았다는 것은 수사기관이 처음부터 증거조작을 적극적으로 하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사정을 종합하여 피고인과 변호인이 추론하기에 송00와 이00은 현장에서 부러진 화살 1개와 정상적인 화살 2개를 압수해 갔다. 그리고 나서 화살을 살펴보니 화살의 촉 부분이 뭉특해서 화살이 양복을 뚫고 몸에 박힐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증거를 조작하기 위해 압수한 석궁케이스에 들어 있던 7개 화살 중 하나를 최초에 압수한 화살 중 부러진 화살을 폐기처분하고 바꿔치기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논리적인 추론이다.

피고인 김명호가 사건 현장에 들고 간 화살은 모두 10개 화살이었다. 이중 1개의 화살이 증발하였는데 이게 바로 이 사건의 중대한 증거인 ‘부러진 화살’ 이었던 것이다. 그 부러진 화살을 수사기관이 폐기 처분한 것이다. 그리고 이점에 대해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수사기관이 이렇게 하였던 것은 피해자 박홍우가 복부에 맞았다고 진술을 하고 있었고 이를 언론이 대서특필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복부에 박힐 수 있도록 화살을 조작할 필요성이 매우 컸던 것이다. 끝이 뭉특하고 부러진 화살을 언론에 공개하였다가는 과연 복부에 박힐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정당한 의문이 제기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부에 맞았다면 당연히 현장에서 수거한 화살 3개에 혈흔이 나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채 정상적인 화살로 바꿔치기를 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소심은 제1심 판결 보다는 더욱 친절하게 “이 사건 범행에 직접 사용된 화실이 부려졌다는 점 및 압수되어 증거로 제출된 화살 9개 중에는 그와 같이 부러진 화살이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는 점은 인정하였음에도 “증거를 조작한 것이라 단정할 수 없고, 다른 증거들과 종하여 범죄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라고 제1심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참. 한 숨만 나오는 판결이유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보편타당성이 있는 증거채택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직접 범행에 사용된 화살이 부러졌다는 것과 그것이 사라졌다고 한다면 수사기관에서 이를 폐기처분하였다고 하는 것이 논리상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증거를 조작하지 않았다고 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럼 당시 현장에 출동했던 경찰관 송00, 이00이가 화살 3촉이 정상적이었다고 한 것은 도대체 무엇이라 말인가.

이는 누가 보아도 부러진 화살을 수사기관이 폐기처분하고 증거조작을 하였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항소심은 이러한 수사기관의 불법행위에 가담하여 실체적 진실을 가리고 적극적으로 범죄행위에 저질렀던 것이다.

이렇듯 조작된 증거로 피고인에게 유죄 판결을 하는 법원의 태도에 대해 피고인과 변호인은 이해하지 못할 바 아니다.. 왜냐하면 고등법원 부장 판사가 피고인이 하지도 않는 행위를 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만약 법원에서 박홍우의 말을 믿기 어렵고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도 믿기 어렵다고 한다면 이는 사법부 전체에 대한 불신을 극도로 몰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죄 없는 사람을 죽일 수는 없는 것이다. 사법부에 대한 불신의 해소는 사법부가 자기반성을 하고 판사가 관련된 이런 사건에서 더욱 엄정하게 판결함으로서 극복될 수가 있는 것이지 사건 조작 은폐에 가담해서 해결될 성질의 것은 아니다. 이점 명심하고 또 명심하여할 것이다.

(3) 박홍우의 와이셔츠에 혈흔이 없는 문제에 대해.

이제 정말로 더 황당한 이야기를 할 차례이다. 박홍우는 당시 양복, 조끼, 와이셔츠, 내복, 메리야스 이런 순으로 입고 있었습니다. 상처는 복부에 났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피가 스며 나오는데 메리야스, 내복, 와이셔츠, 조끼, 양복 이런 순으로 피가 스며 나오는 것은 자연법칙이다.

그런데 내복과 조끼에는 혈흔이 있는데 그 사이에 입고 있었던 와이셔츠에는 혈흔이 전혀 없었다. (팔 쪽에 있는 것은 빼고 말이다.) 화살이 양복 등을 관통하였다고 주장하고 있고 관통의 구멍은 순차적으로 나 있다. 그 구멍 주변에 다른 것은 혈흔이 있는데 왜 그 사이에 있었던 와이셔츠에는 아무런 혈흔이 없을까.

이것 역시 증거 조작이 되지 않는다면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연법칙에 어긋난 것에 대해 검사가 이것이 가능함을 입증하여야 하는 것인데 아무런 입증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1심은 그냥 “조작되었다고 볼 아무런 자료가 없다.”고 하였고 항소심은 더 나아가 “범행 직후 시점에서 위 옷가지에 모두 피해자의 피가 묻어 있었던 이상 나중에 와이셔츠의 혈흔이 사라졌다고 하여” 이를 증거로 삼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 정도면 완전히 코메디 판결문이라 할 것이다. 와이셔츠의 혈흔이 어떻게 사라졌다는 것인가. 그냥 피가 자연적으로 없어졌다는 것인가. 아니면 누가 지웠다는 것인가. 참고는 피는 세탁을 해도 그대로 검출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와이셔츠에 화살 구멍으로 추정되는 주위에 그 어떤 혈흔 반응도 없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증거로 와이셔츠에 혈흔이 사라졌다고 하냐고 말인가. 참 이정도면 짜증이 날 정도의 판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박홍우, 김덕환, 송철호, 고광선 (수사기록 제143쪽 - 특히 고은 배꼽부위에 약 0.5mm 정도의 상처가 있었고 출혈로 인하여 겉옷과 속옷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고 진술하고 있다.)는 와이셔츠에 뻘겋게 물들어 있었다고 명확하게 진술하고 있었다. 그런데 와이셔츠에 피가 없었다. 도대체 피가 있었던 와이셔츠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박홍우는 증언에서 “와이셔츠에 피가 왜 없는지 모르겠다.”라고 하면서 또 모른다는 말만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 그렇게 중요한 증거물인데 왜 피가 없는지 모른다고 해서 그것이 증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항소심에 이에 덧붙여 더 나아가 피가 있긴 있었는데 “사라졌다.”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유죄의 증거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삼척동자도 웃을 수 밖에 없는 것이라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박홍우는 절대적으로 복부에 화살을 맞은 적이 없다.. 그렇다면 박홍우에게 나 있는 “복벽 창상”이 왜 생겼는지 이쯤 되면 궁금하기 짝이 없을 뿐이다. 정말로 피고인과 변호인도 너무나 궁금하다. 이 사건을 접하고 있는 건전한 상식을 가진 일반인들도 무척이나 궁금해 하고 있다. 그 가능성은 자해의 가능성뿐이 없다. 왜 자해를 했는지는 모르다. 언제 자해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무엇으로 자해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칼로 했는지 송곳으로 했는지 알 수도 없다.

이점에 대해 항소심 제5회 공판기일에 증인으로 나온 구급대원 권00은 항소심에서 피고인측이 사실조회로 회신 받은 “구급활동 일지”의 구급대원 평가 소견란에 “피의자가 1~2미터 전방에서 석궁으로 화살을 쏘았다고 하며 화살이 복부에 맞고 튕겨서 나갔다고 함.”이라고 쓴 것에 대해 누구의 말을 듣고 쓴 것이냐고 하자 “당시에 박홍우가 그런 말을 해서 그렇게 쓴 것이다.”라고 명확하게 증언을 한 바 있다. 그리고 상처 크기도 지름 0.5㎝에 지나지 않다고 하였다. 이 말을 그대로 믿는다고 해도 튕겨서 나갔으니 복부에 화살이 박히지 않았다는 것은 명확한 것이었다.

나아가 이 사건에 있어서는 상처부위를 직접적으로 찍은 사진은 수사기록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단 하나의 사진, 붕대를 붙인 사진하나 뿐이었다. 박홍우는 한 번도 그 이외 사진을 제출한 적이 없었다. 등 부위에 멍든 사진들은 제출하고는 있어도 복부 창상 부위에 대해서는 전혀 제출한 적도 없고 수사기관에서도 제출한 적도 없었다.

그리고 항소심은 사건 당시에 옷가지에 피가 묻어있었다고 하는데 그 옷가지가 증거물로 제출된 양복 따위의 옷가지는 전혀 아니었다. 당시 박홍우는 피고인과 실랑이를 한 후 바로 집으로 올라가 양복 따위의 옷가지를 모두 벗고 상의를 폴라티를 입고 평상복 차림으로 구급 차량에 실려 병원에 갔다. 따라서 사건 당시 현장에서 양복 따위의 옷가지에 피가 묻은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현장에 출동을 하였던 구급대원 고00과 권00은 옷가지가 무슨 종류인지를 구별을 전혀 못하고 있고 당시 사건 화면을 보면 박홍우는 평상복을 입은 채 병원 응급실에 있었던 것이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증거물로 제출된 옷가지의 혈흔은 물론이거니와 옷가지 자체가 박홍우가 사건 당시 입고 있었던 것이 아닐 개연성이 매우 높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점에 대해 항소심은 아무런 심리도 하지 않은 채 어떻게 사건 당시에 옷가지에 혈흔이 묻어 있었다고 단정하고 있는지 그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또한 항소심은 “복부에 정확하게 박혔다.”고 주장을 하고 있는데 복부에 정확하게 박혔다는 것이 어떤 증거로 입증되었다는 것인가. 복부에 정확하게 박혔다고 박홍우 자신도 그렇게 진술한 적도 없다. 그저 복부에 박혔다고만 하였다. 그럼에도 이러한 표현을 항소심이 사용한 것은 피고인을 아무런 증거 없이 처벌만을 단행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이러한 항소심의 태도는 이 사건 실체가 전혀 밝혀지지도 않은 2007. 1. 19. 전국 법원장회의에서 이 사건을 사법부 테러로 규정하고 엄단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을 항소심으로 그대도 실행하였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나라에서 “무죄 추정의 원칙”은 어디에서 실현되고 있는지 그저 통탄할 따름이다.

마. 상해의 고의 점에 대해.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피고인은 박홍우에게 석궁으로 상해를 입힌 사실 없어 상해의 고의 문제를 더 이상 논의할 가치가 없으나 항소심이 별도로 상해의 고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얼토당토하지 않는 판결 이유 쓰고 있으므로 이점에 대해서 반박하고자 하는 바이다.

항소심은 “피고인이 안전장치를 풀어둔 석궁을 들고 계단에서 내려와 피해자에 접근하였고 피해자를 향하여 주저함이 없이 석궁을 발사한 사실이 인정된다.”라고 하고 있다.

피고인이 석궁의 안전장치를 풀었다는 것은 이 사건 재판 전체를 통틀어 단 한 번도 그 어디에서 나온 적이 없었다. 화살을 장전하였다는 것은 피고인도 인정을 하고 있으나 석궁의 안전장치를 풀어두었다고 한 사실은 전혀 없고 그 누가 물어본 적도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항소심은 무슨 신기(神氣)가 있었는지 안전장치를 풀어두었다고 하고 있다. 이 정도면 점쟁이 수준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아가 “피해자를 향하여 주저함이 석궁을 발사”하였다고 하는데 도대체 이것은 무슨 증거로 주저함이 없이 발사하였다고 한 것인가. 누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나 있는가. 박홍우가 그런 말을 했는가. 아니다..박홍우는 아무런 기억도 없는 사람이다. 아무도 이런 말을 한 적도 없고 그런 장면이 사진으로 찍힌 적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주저함이 없이 발사하였다고 하고 있는 것인가. 참 신통력이 대단들 하십니다.

그리고 피해자가 석궁을 잡은 적도 없고 손에 상처가 없다는 점을 이유로 들고 있는데 이는 위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박홍우는 처음에는 석궁을 잡았다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박홍우의 손에 상처가 없다는 점은 입증되지도 않는 사실이었다. 피고인이 화살이 발사된 후 당황하거나 놀라지도 아니하였다고 하고 있는데 피고인은 화살이 우발적으로 발사된 후 박홍우에게 맞지도 않아서 당황하거나 놀랄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피고인이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았다고 한 것 역시 이 사건 재판 전체를 통틀어 단 한 번도 그 어디에서 언급조차 된 사실도 없다. 그런데 여기서도 神氣를 발휘하여 이를 인정하고 있으니 참 가소롭다는 생각만이 들뿐이다.

또한 “피고인이 죽여버리겠다.”고 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몸싸움 과정이 아니라 몸싸움이 다 끝나고 체포되어 있는 과정에서 나온 말로서 흔히 일반인들이 하는 소리에 지나지 않은 것인데 이를 상해 고의가 있다는 점으로 인정하고 있으니 참 황당할 뿐이다. (이글에서 황당하다 따위의 말을 자주 쓰고 있어 나도 짜증나지만 무슨 말로 표현할 길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바. 정당방위 문제에 대해.
피고인이 힘주어 주장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법관을 제어할 수 있는 장치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법관은 자유 심증주의 뒤 그늘에 안주하여 무오류의 재판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피고인은 교수 재임용에 대한 대법원의 위헌, 위법적인 해석을 통해 400여명에 이르는 교수들을 사법부가 강제적으로 교육현장에서 떠나도록 하였고, 피고인과 관련하여서는 1995년 성균관대 입시부정 문제를 완전히 눈감고 피고인을 교육 현장에서 축출하였다. 이후에 2003년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판결과 특별법의 제정을 통해 피고인이 사법부의 판단을 다시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만 사법부 특히 이 사건 교수지위확인 소송의 재판장인 박홍우는 피고인에게 증인채택 여부도 알려주지 않은 채 기습적으로 증인 신문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이 서명하지도 않는 허위의 증거를 채택하여 피고인을 “교육자 자질 없는” 사람으로 매도하는 등 재판 절차 진행 과정에서 민사소송법 등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피고인의 기일 지정 신청과 시기에 늦은 공격방법 증거 신청에 대해 각하를 하여야 한다는 의견을 합리적 이유 없이 배척하였고, 선고 기일을 통지하고서도 합리적 이유 없이 변론을 재개한 다음 무려 4개월이나 소송을 지연시키고 이후에 성균관대 측의 증인신청을 기습적으로 받아들여 증인 신문을 하는 등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는 재판 행위를 하였다.

이에 피고인은 1인 시위, 인터넷 홍보, 진정서 탄원서 제출, 기자 회견 등 합법적 수단을 총 동원하여 이의 시정을 요구하였으나 돌아온 것은 판결 테러였다. (이 사건도 판결 테러의 전형임을 물론이라 할 것이다.) 이에 피고인은 박홍우를 찾아가 그런 판결을 어떻게 할 수가 있는지를 따져 묻기 위해 석궁을 들고 간 것일 뿐 다른 행위를 한 적도 없다. 이러한 피고인의 행위는 피고인 및 교수 전체의 법익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사법적 침해를 방위하기 위한 상당한 행위로서 정당방위에 해당하는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점에 대해서도 피고인은 이 사건 재판 과정에서 입증하고자 하였으나 박홍우에 대한 반대신문을 극악무도하게 제약을 하고 대부분의 증거 신청을 기각함으로써 이를 입증할 기회도 가지지도 못하였던 것이다.

3. 항소심 판시 범죄 사실 제1항, 공소사실에 대한 채증법칙 위반, 사실 오인 및 법리 오해에 대해.

가. 공소사실의 요지
피고인은 2005. 9. 28.경부터 2006. 2. 24.경까지 대법원 정문 앞에서 사실은 피해자 양승태, 이광범, 이상훈 판사 등이 법관의 직무수행상 부적절한 행위를 한 사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양승태 대법관님 성대 입시 부정 눈감아 시험부정 만연케 한 책임을 통감하세요.” “이광범 사법 정책 실장님 이상훈 친형의 직무유기를 덮는 것도 사법 정책입니까.” “쓰레기 판다는 쓰레기 통으로 김치도 수입한다. 판사도 수입해라” “이광범 인사 실장 이상훈 친형 직무유기 감싸기요?. 판사 형제는 용감했다?”는 허위 사실이 기재된 대형 피켓을 자신의 몸과 가로등에 내걸고 1인 시위를 함으로서 허위 사실을 적시하여 동인의 명예를 훼손하고,

같은 일시 경 서울고등법원 동문 앞에서 사실은 피해자 이혁우 판사가 법관의 직무 수행상 부적절한 행위를 한 사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대 출신 이혁우 판사는 눈뜬장님인가? 성대 입시부정 눈감은 건가” 라는 허위사실을 기재한 피켓과 내걸고 1인 시위를 함으로써 공연히 허위사실을 적시하여 동인의 명예를 훼손하였다는 것이다.

나. 항소심의 판결의 위법 부당성에 대해.
이러한 항소심의 판결은 명예훼손의 법리를 완전하게 오해하고 있는 것으로서 공소사실 기재 자체로도 “사실의 적시”가 전혀 없는 피고인의 의견과 감정을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어서 형법 제307조 제2항의 구성요건 자체를 충족하지 않는 것이다.

그나마 명예훼손의 구성요건을 충족할 만한 것으로서 “성대입시 부정 눈감은” 정도의 것인데 이는 정확히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서 허위의 사실이 될 턱이 없는 것이다. 이 사건의 발단은 1995. 1. 있었던 성대 입시 과정의 수학 문제에 대해 피고인이 그 오류를 정확하게 지적하자 그 보복으로 성균관대가 피고인에 대한 승진임용을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재임용에서 조차 탈락 시켰던 것에서 연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둘러싼 소송에서 양승태, 이혁규 판사는 이러한 성대의 입시 부정에 대해서는 전혀 판단하지 않거나 인정할 수가 없다는 판단을 하면서 피고인에 대해 패소 판결을 하였던 것이다. 이점에 대해 피고인이 이를 지적하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한 것은 명예훼손에 대한 위법성 조각 사유에 해당하는 행위이지 결단코 허위 사실에 의한 명예훼손죄를 구성한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아가 이 사건에 대한 증거라고는 제3자인 대법원 경비대장 전00의 증언과 판결문 사본만이 있을 뿐인데 어떻게 해서 위 내용이 허위사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인지 참으로 황당한 증거채용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무엇으로 허위 사실이 입증된다는 것인가. 판결문이 허위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인가. 아무것도 없다. 증거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죄를 인정하고 있다. 정말 다시 한 번 통탄할 따름이다.

그리고 명백하게 지적해 둘 것이 있다. 이 사건 공소사실은 형법 제312조 제2항이 규정하고 있는 바와 같이 “반의사 불벌죄”이다.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여 공소제기 할 수도 없고 공소제기 되었다고 하더라도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공소기각 되어야 하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피해자의 의사를 물어 본적이 수사 과정이나 제1심과 항소심의 재판과정에서나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피고인이 피해자로 지목된 판사들에 대해 증인 신청을 여러 번 하였으나 제1심과 항소심의 재판장은 납득할 수가 있는 이유를 들이대지 않는 채 증거 신청을 계속적으로 기각하였다.

이런 재판은 재판이라 할 수가 없다. 피해자가 판사가 아니고 일반인이었다면 과연 이런 식의 재판을 하였을까. 절대적으로 그런 재판 진행은 불가능하다. 명예훼손에서 피해자의 증언이 없는 재판을 해 본적이 언제 있는가. 단 한 번도 없었다.

더 나아가 반의사 불벌죄에서 피해자를 불러 수사하지 않고 제3자 만의 고발만을 들어 기소한 적이 있는가. 내가 과문에서 그런지 몰라도 그런 사례를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다. 피해자의 의사가 중요한 사건에서 피해자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고 기소하는 예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것은 법치주의에 대해 정면 도전한 수사이고 재판이다. 사람을 평등하게 법 앞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차별적으로 다루고 있는 반 법치주의 행태라는 것이다. 이는 법률을 빙자한 거대한 폭력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피고인이 법원에 대해 악착같이 그 부당성을 제기하고 일인 시위를 하자 비겁하게 제3자인 전00을 통해 고발하도록 하고 이를 기소하도록 한 보복 행위였다고 평가하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라 할 것이다.

피고인에게 보복 행위를 하였던 것은 이 나라의 사법부였다. 정말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독재 정권의 시녀 노릇을 하면서 애꿎은 애국지사들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하고 (인혁당 사건), 고문으로 조작된 무수한 간첩 사건들을 모두 유죄로 인정하여 장기간 징역을 살렸던 사법부가 무릎을 꿇고 반성을 하지 못할망정 “사법부는 무오류의 판단을 한다.”는 신화에 사로잡혀 거기에 도전하는 모든 행위를 용납하지 않는 자세를 여전히 견지한다면, 그것은 사법부의 화를 자초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Ⅳ. 사법부에 양심이 있기를 기대한다.

만약 대법원이 항소심의 재판을 그대로 수긍하는 판결을 한다면, 더 이상 대법원은 대법원이 아니다. 난 결코 이 사건을 개별적인 사건으로 보지 않는다. 그런 시각에 절대로 동의할 수가 없다. 이 사건은 사법부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