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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궁 재판은 사법부의 '재판테러'다

김명호 ‘석궁 교수’가 4년10일의 감옥 생활을 끝내고 나왔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고, 판검사들을 신랄히 비판했다. 진실을 알리고자 ‘또 다른 싸움’을 준비 중인 그를 만났다.

[183호] 2011년 03월 14일 (월) 13:38:20 오윤현 기자 noma@sisain.co.kr

‘석궁 교수’ 김명호(54). 그가 감옥을 나선 지 50일이 되어간다. 영어의 몸으로 산 지 꼬박 4년 하고도 10일. 1월 23일 새벽 출소한 뒤 그는 ‘1795’ 수번이 쓰인 흰 운동화를 신고 가끔 지인들을 만난다. 그 자리에서 누군가 “이제 어떻게 할 거냐”라고 물으면 그의 대답은 간단명료하다. “지난 4년 동안 사법부와 싸워온 자료들을 정리하고 있다.” 그의 홈페이지(seokgung.org)에는 그 자료들이 빼곡히 담겨 있다.

싸움이란 ‘석궁 재판’으로 비롯된 사법부와의 일전을 말한다. 석궁 재판 이전부터 교수 지위확인 소송, 명예훼손 고발 사건(그가 판사들의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하자, 대법원 경비대장이 판사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고발한 사건) 등으로 사법부와 수없이 부딪쳐온 그다. 수감 중에도 일명 DNA법 소송, 석면 소송 등을 제기하며 사법 권력의 부당한 행사에 온몸으로 맞섰다.
출소한 이후 그를 네 번 만났다. 그때마다 그는 자신의 결백을 강조했고, 반복해서 사법부를 규탄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부터가 신랄했다.


ⓒ시사IN 백승기 고등법원 박홍우 판사를 석궁으로 쐈다는 죄로 ‘중형’을 받은 김명호 전 교수.

4년 만에 세상에 나왔다.    
'법의 입'에 불과한 법관들이 법을 묵살하는 소송지휘로 국민을 우롱해왔다. 석궁 관련 재판에서도 그 같은 일이 반복해 일어났다. 그것에 저항하고 바로잡으려다보니 여기까지 왔다. 온 힘을 다해 ‘사법 테러’에 맞섰지만, 나 혼자서는 넘을 수가 없었다.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저항했지만, 결국 증거를 조작해가며 감옥으로 내몰더라. 지금도 국민의 머슴에 불과한 법관들이 법과 국민 위에 군림하고 있다.

증거 조작이라니? 대법원도 유죄를 인정했다.

(석궁 사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고 물은 뒤) 석궁 재판은 거의 모든 게 조작되었다. 처음부터 유죄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지만 석궁을 들고 간 건 사실 아닌가. 
석궁 들고 간 게 뭐가 잘못인가? 이것을 문제삼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느낀다. 자신의 권리를 빼앗기고도 분노하지 않는 인간은 사람도 아니다. 판검사들이 날 죽이겠다고 달려드는데 가만히 앉아서 ‘날 죽이시오’ 하고 있을 사람이 어디 있나? 석궁을 들고 가기 전에 1인 시위, 인터넷 홍보, 진정서·탄원서 제출, 기자회견 같은 합법적 수단을 다 동원해 (성균관대) 교수 지위 회복 판결을 내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사법부와 박홍우(김 전 교수로부터 석궁 화살을 맞았다고 주장한 판사. 김 전 교수는 판사라는 직함을 빼고 이름만 불렀다)는 재판정에서 나(원고)에게 증인 채택 여부도 알려주지 않고 기습적으로 증인 신문을 하는가 하면, 학생들이 서명하지도 않은 허위 증거를 채택해 나를 ‘교육자 자질이 없는’ 학자라고 매도하는 등, 위법한 소송 지휘로 날 죽였다. 그런 상황에서는 국민 저항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법관이란 머슴들이 어떻게 법을 위반하여 국민을 우롱하는가를 국민에게 알리고자 석궁을 들고 간 것이다. 내가 테러를 한 게 아니라, 그들이 법 위반을 해가며 재판 테러를 자행한 것이다.  

   
석궁 사건 당시 박홍우 판사가 입었던 내복(왼쪽)에는 복부에 혈흔이 있지만, 그 위에 입은 와이셔츠(오른쪽)에는 혈흔이 없다.
석궁을 쏘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렇다. 직접 석궁을 쏜 적이 없다. 석궁을 들고 가까이 다가가자 박홍우가 활대를 잡았고, 그 과정에서 승강이를 벌이다가 화살이 발사되었다.

그렇지만 박 판사 복부에 화살 맞은 자국과 옷가지에 혈흔이 남았다.

모두 조작된 것이다. 박 판사는 1.5m 거리에서 내가 석궁을 쐈고, 자신의 상처 크기가 2cm 정도라고 주장한다. 사건 당일에 긴급 출동해 박 판사를 서울의료원으로 이송한 119 구급대원이 (박 판사의 말을 듣고) 작성한 <구급활동일지> ‘평가 소견란’에는 상처 크기가 ‘지름 0.5cm 정도 창상 有’라고 기록되어 있다. 후하게 쳐서 박 판사의 말대로 2cm라고 해도, 1.5m 거리에서 석궁을 맞고 그 정도 상처(상해 3주)에 그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게 석궁 전문가의 증언이다(실제 경찰이 돼지고기에 박 판사가 사고 당시 입었던 ‘옷들을 입힌 뒤’ 1.5m 거리에서 석궁을 쏜 결과, 화살이 돼지고기를 10cm 이상 파고들었다).     

박홍우 판사가 화살을 안 맞았는데, 위증을 했다는 주장인가?

그렇다. 그는 상처를 공개한 적이 없다. 넘어지며 생긴 등쪽 멍은 공개하면서 화살에 맞았다는 자국은 보여주지 않았다. 그리고 앞서 말한 사건 당일의 <구급활동일지> '평가 소견란'에도 ‘피의자가 1~2m 전방에서 활을 쏘았다고 하며 활이 복부에 맞고 튕겨나갔다고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박홍우가 119 구급대원에게 그렇게 말한 것이다.


   
ⓒ시사IN 백승기
김명호 전 교수의 교도소 일지에는 교도소 비리가 낱낱이 적혀 있다.
그로부터 상당 시간을 김명호 교수는 석궁 사건의 핵심 증거들이 조작 혹은 은폐됐음을 설명하는 데 할애했다. △박홍우 판사가 자신의 복부에 박힌 것을 빼냈다는 ‘부러진 화살’이 사라진 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제출된 혈흔(석궁 사건 당시 박홍우 판사가 입고 있었다고 주장한 옷가지에 묻은 피)이 당사자의 것이 맞는지 확실치 않아, 재판부에 유전자형 비교 분석을 요청했는데도 재판부가 ‘박홍우 판사의 피를 구하기 어렵다’는 이유 등을 내세워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점 △박홍우 판사가 당일 입었다는 속옷·내복·조끼에서는 혈흔이 발견됐는데, 조끼와 내복 사이에 입었던 와이셔츠에서는 혈흔이 발견되지 않은 점 등이 그것이다. 그의 이 같은 문제 제기를 법원은 번번이 석연치 않은 이유로 기각했다. 이와 관련해 김명호 교수는 최근 대법원에 다시 와이셔츠 혈흔 감정 요청을 했다고 말했다.

이들 증거가 김 전 교수 주장대로 조작 혹은 은폐됐는지 법정에서 밝히려면 또다시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설사 김 전 교수의 말이 맞다 할지라도 석궁을 들고 판사를 찾아간 그의 행위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지은 죄에 비해 양형이 지나치게 무거웠다는 사실이다. 박홍우 판사가 받은 진단은 상해 3주. 1.5m 거리에서 쏜 석궁이 꽂혔는데 이 정도 상처만 입은 것도 미스터리지만, 전치 3주의 상해를 입힌 초범에게 4년이라는 중형은 통례를 벗어난 일이라는 것이 법조계 안팎의 중론이다. 최정학 교수(한국방송대·법학과)에 따르면, 피해자의 신분이나 피고인과 피해자의 관계가 형량을 정하는 데 하나의 요소가 되기는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래서 최 교수는 석궁 사건의 경우 “범죄 동기나 배경, 또 범죄의 결과 즉 피해자에게 입힌 상해의 정도를 고려할 때 오히려 형을 감형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고 반문한다.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되돌리기 어려운 수준에 이른 것 같다.
당하지 않으면 사법부의 패악을 모른다. 그들은 “힘없어 당했으면 그냥 찌그러져 있지, 니들이 뭘 어쩔 건데?” 식으로 상전(국민)을 업신여긴다. 법관들의 소송 지휘가 법에 따라 이루어지는가를 감시하는 국민 기구나 제도가 없는 한, 나같이 재판테러 당하는 사람이 끝없이 나올 것이다.

공정하다는 법이 당신의 인생을 바꾸어놓은 셈이 됐다.

판검사들이 법을 위반하는 소송 지휘와 ‘묻지마 불기소’ 처분으로 신상필벌의 원칙을 무너뜨리고 있다. 산수 문제 2+3×5에서 3×5를 먼저 계산해야 하듯이 법에도 우선순위가 있다. 바로 헌법이다. 헌법에 규정된 국민 권리만큼 중요한 게 없다. 그런데 요즘은 헌법 다음인 사법부, '법의 입'에 불과한 판사들이 세상을 쥐락펴락한다. 요즘 우리나라는 법과 국민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사법부의 ‘독재 국가’이다.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판단할 수 있는 일까지 모두 법원으로 끌고 와 온갖 로비와 뇌물로 면죄부 판결문을 받아내고 있는 실정이다.        

왜 법에 의존하는 사회가 되었다고 생각하나.

사람들이 자기가 뭘 알고, 뭘 모르는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남에게 자꾸 의존한다. 각 분야의 전문가 부재도 사법부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이유이다. 선진국에서는 어떤 사안이 발생하면 그 분야 전문가가 나서서 해법을 제시한다.

사정이야 어떻든 진상 규명을 하려면 아직 할 일이 많다.

진상 규명? 진상은 이미 다 규명되었다.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건 (법원의) 증거 조작과 거짓 판결을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는 일이다. 

검찰과 재판부가 무시하고 외면한 진실을 밝히고, 이를 국민에게 널리 알리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남은 숙제이다. 그의 ‘적’은 사법부만이 아니다. 교도소에 4년여 갇혀 있는 동안 그는 끊임없이 교정 당국과도 부딪쳤다. 때로는 서신 검열에 항의해서, 때로는 비인간적인 대우에 저항해서 말이다. 출소하기 며칠 전에는 DNA 채취를 놓고 교도관들과 한바탕 전쟁을 벌였다. 


출소 직전에 교도소 내에서 DNA 채취에 저항한 일이 보도되었다.

1월20일 내가 있는 독방에 들어온 교도관 넷이 팔과 다리, 머리를 붙잡고 내 머리카락을 열 올이나 뽑아갔다. 그전에도 구강에서 DNA를 채취하려고 하기에 입 다물고 반항했더니, 결국 모발 뽑는 영장을 발부받아와 강제로 뽑아갔다. 

‘DNA 신원확인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DNA법)에 따른 것이었나?

맞다. 지난해 7월에 디엔에이(DNA) 법이 생겼지만 인권침해 가능성이 상당한 데다, 나는 해당자도 아닌데 소급 적용해서 뽑아가더라. 참을 수 없어서 내 변호인인 박훈 변호사를 대리인으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냈다. 헌법이 보장한 인간의 존엄권 등을 침해할 수 있다고 본 거다(DNA법은 아동·청소년 성폭력이나 살인, 강간, 강도 등 강력범죄와 절도, 방화, 약취·유인, 폭력 등 총 11가지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대상으로 한다.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영장을 발부받아 채취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이미 국회에서도 일부 의원들에게 ‘위헌’ 내지 ‘악법’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교도소 내 서신 검열이 부당하다며 소송을 진행하기도 했다.
[형집행법] 43조에 의하면 서신 내용을 검열할 수 없다. 그러나 봉투를 봉하지 않고 교도관에게 제출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교도소나 교도관에 불리한 내용이 있으면 재소자를 불러 회유·협박해 내용을 고치게 한다. 교도소 내로 들어오는 편지도 마찬가지다. 금지 물품의 존재를 확인한다는 입에 발린 말을 하고 있지만, 국가인권위가 지적했듯이 '명백한 위험이 현존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절대 서신 검열을 해서는 안 된다. 교도소 이야기가 안팎으로 자유롭게 드나들어야 교도소 내 비리가 줄어든다. 

춘천교도소에서는 석면 관련 소송까지 제기했다.

어느 날, 밖에서 건축업을 했다는 한 수감자에게 교도소 내에서 석면을 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수감자들도 인간인데, 석면이 쓰였다면 정말 문제 아닌가. 그래서 교도소장에게 1979~1981년 사이에 지어졌다는 교도소 설계도면과 당시 쓰인 자재 목록을 요청했다. 그렇지만 보기 좋게 거부하더라. 그래서 할 수 없이 문서제출명령신청을 했다. 그랬더니 판사가 교도소 측 말을 빌려 “교도소의 위치 정보 등 보안상 문제로 설계도면을 보여줄 수 없다. 정 의심 가는 부분이 있으면 나랑 같이 다니며 뜯어 확인해보자”라고 말했다. 하지만 거부했다. 석면은 전문가들조차 눈으로 확인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문가 도움을 받아 위치 정보와 관련 없는 도면 목록표, 실내재료 마감 상세도 등에 대한 문서제출명령신청을 다시 했고 현재 계류 중이다. 


그는 출소 뒤 오랫동안 거주하던 서울 상도동에서 벗어나 요즘은 노량진 역 근처 아버지 집에서 쉬엄쉬엄 살고 있다. 그러나 ‘깐깐한 성품’ 탓에 가족들에게 살짝 타박도 듣는다. 아내에게는 “이제는 좀 조용히 살자”라는 소리를, 여동생에게는 “오빠의 독립투사 기질은 인정하지만, 이제 우리 집에 독립투사가 있는 건 싫다”라는 말을…(그렇지만 두 사람 다 그의 지적에는 100% 공감한다고). 그는 “요즘 새삼 내 지천명(하늘이 내게 준 일)이 뭔지 깨달았다”라며, 조용히 살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다시 물었다.



새삼 깨달았다는 지천명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사회 구성원은 사회가 약속한 법과 규칙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그 법과 룰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고, 이 나라 사람들은 그 같은 상황에 대해 이미 체념해버렸다. 그들, 법 위에 군림하려고 하는 자들을 가차없이 지적·비판하는 것이 하늘이 내게 준 명령이 아닌가 싶다.

그 마르지 않는 용기와 열정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하다. 
분노와 좌절에 대한 약한 면역력인 듯하다. 누군가에게 당하면 조심하기 마련인데, 나는 부당한 일로 강하게 탄압받으면 더욱 더 강하게 반발하게 된다. 타고난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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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오며, 살아가며 법위에 존재하는 거대집단이 된 언론, 정치, 수사, 법조계의 권력형 사람들을 보며 절말로 공정치 못한 사회라는 인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성공은 그런 권력집단속에 들어가는 것이고 그 다음이 기업이라도 일궈 경제적인 삶을 누리는 것이다. 그 경제적인 삶이란 것도 역시 권력집단이 벼르면 결국 쓰러지고 말아야 하는 세상.....이것이 민주주의라면 우리는 단지 법이 아닌 그 집단의 눈에 거슬리지 않고 눈치보며 살아가려 하는 나약한 국민일 뿐. 국민을 위한 법이 아닌 권력(특권)층을 위한 법이 이미 사회에 독버섯처럼 조직화 돼있다. 법이 법이 아닌 권력인 세상이다..김교수님 힘내세요! 11.03.21|삭제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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