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똥개년들 김활란, 고황경, 박인덕, 송금선, 황신덕: 프레시안 - 석궁 김명호
[ 이슈추적 ] 2003년12월26일 제490호

교육부, 이름은 바뀌었으나…

교육부의 정식 명칭은 ‘교육인적자원부’다. 김대중 정권은 지난 2000년 교육정책의 중점을 인재양성 기능에 둔다면서 이렇게 고쳤다. 장관도 부총리급으로 격상시켰다. 이 명칭은 교육을 인적자원 양성 기능으로 축소시킨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지식기반 사회에 대비해야 한다는 대세에 밀려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교육부의 첫 이름은 문교부(文敎部)였다. 문교부는 이승만 정권이 출범한 직후부터 전두환 정권 때까지 약 42년간 사용됐다. 문교부는 그 어감에서도 드러나듯 권위적인 교육정책으로 악명이 높았다. 교사와 학생을 통제의 대상으로 볼 뿐, 이들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관주도의 정책은 일선 학교의 현실과 잘 맞지 않았다. 급기야 교육계에서는 ‘문(文)교부’를 ‘문(問)교부’로 바꿔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돌았다. 교육정책을 입안할 때 ‘일선 학교에 물어보고 하라’는 뜻이었다.

노태우 정권은 출범 뒤 일선 학교의 목소리를 잘 듣겠다며 이름을 ‘교육부’로 바꿨다. 그러나 전교조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교사와 학생들의 목소리는 철저히 무시됐다. 역대 장관 중 ‘문교부’에서 일한 장관은 30명, ‘교육부’는 10년간 12명이다. 앞으로 ‘교육인적자원부’에서 일할 장관은 몇명이나 될까. 노무현 정권에게 묻고 싶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대학교육 망치는 관료들/ 정대화

대학 이야기를 해야겠다. 일전에 교육부가 보낸 공문에 “고도의 자율성과 전문성을 지닌 교육자치의 주체”라는 식의 표현이 있었다. 교수를 일컫는 말인데 전문성도 전문성이려니와 교수가 고도의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은 듣기는 좋지만, 턱없는 거짓말이다. 나는 대학교육을 규율하는 고등교육법이나 사립학교법 어디에서도 그런 조항을 발견하지 못했다.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교수에게는 `기간제 임용'이라는 제도가 있다. 통상 `재임용제'라 불리는 이 제도는 유신독재가 교수의 입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도입한 것으로 어느 직종에도 없고 어느 나라의 교수에게도 없는 희대의 악법이다. 나는 국가의 막중대사를 다루는 공무원이나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들에게 재임용제가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거니와 유신독재의 악법이 국민의 정부에서도 유지되는 이유를 모르겠다. 사람이 먹는 약이 사람을 죽인다면 독약인 것처럼 교수에게 적용되는 법이 선량한 교수를 억압한다면 악법인 것이다.

재정문제는 더욱 가관이다. 대학재정의 조달은 일차적으로 교육부의 몫이다. 유럽에서는 대학재정의 전부를 국가가 부담하고 사학이 발달한 미국에서도 50% 이상을 책임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국가가 대학재정의 10% 남짓한 정도만을 부담하고 있으니 국가가 높은 교육열을 이용하여 공짜로 대학을 운영하는 셈이다. 재정조달에 무책임한 관료들이 통제에는 전문가인데 재정지원에 인색한 교육부가 대학운영에 간섭할 권한이 있는지, 몇몇 교육관료가 400개에 달하는 대학을 통제하고 조정할 능력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지원하고 육성하되 간섭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정책인데 지원은 않고 간섭과 통제로 일관하는 관료들의 발상이 부러울 뿐이다.

교육부가 최근에는 국립대의 등록금 자율화와 자립형 사립고를 통해 `도적 심보'까지 드러내고 있다. 말이 좋아 자율과 자립이지 핵심은 국가는 돈 한푼 안들이고 엄청난 사교육비에 고액의 등록금까지 얹어 학부모 등골을 빼는 방식으로 학교를 운영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교육재정 확충 요구를 송두리째 학부모의 부담으로 전가하겠다는 것인데, 등록금으로 움직이는 대학이 국립대인지, 일부 자립형 사립고로 교육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사교육을 흡수하고 교육재정을 확충하여 학부모의 부담을 줄이면서 교육을 정상화하겠다는 말이 왜 교육부에서 안 나오는가.

이런 교육부가 교수들이 노동조합을 한다고 선무당 사람잡은 식으로 징계권을 남용하더니 한 술 더 떠서 올해부터는 모든 교수들을 계약제로 임용하겠다고 교육공무원임용령을 개정했다. 세상에 어느 나라가 법률로 교수에게 계약제를 강요하는지 묻고 싶다. 부패사학 척결에는 날 빠진 무딘 칼이고 사립학교법 개정에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교육부가 교수노조 탄압과 계약제 시행에는 물불 안 가리니 교육마피아와 사학집단의 음모론이 나오는 것이다. 기존의 재임용제와 교수업적평가로는 부족해 계약제와 연봉제까지 받아들이되 노동조합은 하지 말라니 교육부는 6만 교수의 몸에 겹겹이 쇠사슬을 걸어 현대판 노예로 만들 작정인가?

교육부는 교육재정 확충과 부패사학 척결에 집중하고 나머지 일은 대학과 교수들에게 맡기면 된다. 전국의 모든 교수들이 반대하는 잘못된 정책으로 정권에 부담을 주고 대통령에게 누를 끼치는 것이 누구 좋으라고 하는 일인지 모르겠다. 계약제가 경쟁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관료적 소신이라면 교육관료들에게 먼저 시행하자. 관료들이 교수를 개혁의 대상으로 삼고 자신의 정책적 실패를 은폐하면서 교수들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여 교수들을 거리로 내몬다면 교육부와 관료들이 먼저 수술대에 오르게 될 것이다. 교육관료들의 오판이 대통령의 개혁에 오점을 남기고 `교육저항'을 촉발하는 뇌관이 될 것 같다.

정대화/상지대 교수·정치학




이런 권력 추종 기회주의자들을 교육자, 선각자라고 부르는 인간들이 무섭다

친일 매국에 앞장선 여성들(원제: 친일파 된 여성 교육선각자들)

<자료입수> 김활란 등 선각 여성 5인의 친일행적

조병래 기자, 임경구 기자, 전홍기혜 기자 2002.03.08 16:23:00

프레시안은 세계여성의 날인 8일을 맞아 우리나라 근대 여성운동 및 교육의 선구자로 얘기되는 여성 5명의 친일 행적을 공개한다.
지난달 28일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회장 김희선 의원)이 발표한 '친일파 708명' 명단에 포함된 이들 여성계 인사의 친일 행적도 민감한 내용이다.
이들 여성들은 교육과 여성운동의 선각자로 평가받아 왔으며 이들의 행적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이들이 설립한 학교와 여성지원단체가 활동 중이다.
방응모ㆍ김성수가 친일파에 포함되자 이들이 설립한 조선ㆍ동아일보가 논쟁을 야기했듯이 여성계 일부에서도 이들이 친일파 명단에 포함된 데 대해 크게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우리나라 여성운동 및 근대교육에 기여한 공로가 많다고 해서 이들의 친일 행적이 덮어지는 것은 아니다.
프레시안은 독자들의 판단을 돕기 위해 국회의원 모임이 작성한 여성계 '친일파' 인사의 친일행적을 언론계에 이어 두 번째로 전재한다. 편집자 주

김활란(金活蘭)의 주요 경역 및 친일경력

-1899년 인천생
-1918년 이화학당 대학과 졸업
-1923년 김필례(金弼禮), 유각경(兪珏卿) 등과 함께 YMCA를 창립
-1924년 미국 오하이오 웨슬레안 대학에서 교육, 철학 등을 전공하고 졸업
-1924년 9월 보스턴 대학원에 입학하여 문학석사 학위 받음
-1925년 6월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및 학감에 취임
-1927년 민족, 사회 양진영이 손잡은 근우회(勤友會)의 창립 때 기독교 대표로서 발기총회 준비위원, 창립총회 임시의장, 초대 임시의장, 초대 중앙집행위원을 맡음
-1928년 7월 근우회 2차 중앙집행위원회 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임의로 활동을 중단
-1930년 도미하여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 받음
-1937년 조선부인문제연구회 상무이사
-1937년 작위를 받은 귀족부인들이 일본의 침략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금비녀를 뽑아 바치자고 조직한 '애국금채회(愛國金釵會)'의 간사
-1938년 6월 8일 조선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에서는 위원회를 개최하고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세계기청으로부터 퇴맹키로 결의하는 동시, 내선일체란 단일국민의 이념 하에 일본기청에 가맹키로 하였는데, 이때 경성실행위원이다.(매일신보 1938. 6. 9)
-1938년 6월 20일 이화여전과 이화보육의 4백명 처녀들로 '총후보국을 내조한다'는 애국자녀단을 조직
-1939년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이화보육학교의 교장으로 취임
-1940년 10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1940년 10월 16일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발기인, 이사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1941년 9월 16일에 전조선에 6개반을 동원, 10월 30일부터 1주일간 39개소에서 '부인생활정의'라는 연재로 강연반을 편성하였을 때 제5반으로 평양, 진남포, 안주, 신의주, 선천, 정주에서 강연활동
-1941년 10월 22일 현재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1941년 11월 15일 창립된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1941년 12월 2일을 기하여 저명한 부인강사를 각지에 파견하여 전국인식과 징병, 징용제의 취지를 철저히 하는 순회강연을 하기로 하였는데 김활란은 충청북도에 파견되었다.
-1941년 12월 27일 오후 2시 부민관 대강당에서 조선임전보국단 결전 부인대회를 결성하고 오후 6시 '여성의 무장'이라는 연제로 강연
-1942년 2월 15일 부민회관에서 열린 영(英) 동양침략의 아성 싱가폴 공략 대강연회에서 '대동아 건설과 우리의 준비'라는 연제로 강연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1946년 9월 파리에서 열린 국제연합총회 한국대표
-1956년 11월, 1957년 10월, 1958년 10월, 1959년 9월, 1965년 12월 등 다섯 차례에 걸쳐 국제연합총회 한국대표로 참석
-1961년 9월 이화여자대학교를 정년퇴직하고 명예총장 겸 재단 이사장으로 봉직
-1962년 11월, 1964년 11월, 1966년 11월의 제12~14차 유네스코 총회의 한국 수석대표 및 대표로 참석
-1963년 교육부문 대한민국장 수상
-1965~1970년 사망 시까지 대한민국 순회대사로 임명되어 활동함
-1970년 사망 후 대한민국 일등수교훈장이 추서됨

김활란의 친일행적

<<친일의 길 걸은 여성 권력추종똥개의 대명사>>
<교육, 기독교계 여성 권력추종똥개의 대명사>

- 김활란은 한국 근대여성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박사 1호이며 일제 하에서 전문학교의 유일한 여성교장 그리고 YWCA 창립자' 등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교육,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혀 왔다. 그리고 8.15 해방 이후에는 이화여대 총장직과 여러 학교의 이사장직을 맡았으며, 사회단체로는 YWCA, 한국여성단체협의회, 대한부인회, 주부클럽연합회 등 여성단체를 설립하고 회장 등의 임직원을 역임하였고 정부수립 직후에는 유엔총회 한국대표, 공보처장, 대한민국 순회대사, 한국아시아반공연맹 이사 등 정치, 외교활동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의 공로로 교육부문 대한민국장, 대한민국일등수교훈장, 필리핀으로부터 막사이사이 공익부문상, 미국으로부터 종교권력추종똥개에게 주는 다락방상을 받았다.

그러나 교육, 여성계에서 그가 누렸던 명성과 지위만큼이나 일제말기에는 당시 활동한 어느 여성보다도 자주 친일단체에 이름을 내놓았고, 많은 친일 논설을 발표했으며,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부응하는 행동을 취했다.

<민족주의자 이화학당 교사 김활란>
- 그가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하고 이화학당 교사로 있을 때 3.1 운동이 일어났다. 그 당시 그는 지하독립운동 조직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의 자서전 '그 빛 속의 작은 생명'을 보면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는 참으로 중대한 일을 맡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것은 발각되기만 하면 가차 없이 중한 형벌과 희생을 부를 만한 일이었던 것이다. 나는 비밀독립운동단체에서 일부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것은 학교와 교회여성단체로부터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단체로 보내는 독립운동자금을 중앙본부에 전하는 일이었다. 나는 엄중한 지령 하에 움직였다.'
이 일로 하여 1년 남짓 도피생활을 하고 그는 다시 이화학당 교사직을 맡았으며 1920년에는 이화학당 학생들로 조직된 전도대를 이끌고 평양, 신의주 등 북부지방 선교에 나서기도 하였다.


1922년 5월경 김활란은 유각경, 김필례와 함께 YWCA를 창립하고, 7월말 미국 유학의 길에 올랐다. 유학 중에는 YWCA 관련 국제회의에 몇 번 참석한 것 외에는 조국독립을 위해 일하자는 현지 독립운동단체들의 요청을 모두 거절했다.

- 1926년 말부터 민족, 사회 양 여성운동 진영간 통일전선 결성 움직임이 활발했다. 미국에서 귀국한 뒤, 기독교계 핵심인물로 떠오른 김활란도 이러한 움직임을 멀리 할 수 없었다.
1927년 5월 27일 마침내 민족, 사회 양진영이 손잡은 근우회(勤友會)가 탄생했다. 근우회 창립 초, 김활란은 기독교계 대표로서 발기총회 준비위원, 창립총회 임시의장, 초대 중앙집행위원을 맡으며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이후 근우회는 1928년 7월의 제2차 중앙집행위원회는 사회주의 세력이 대거 진출했다. 김활란은 2차 중앙집행위원회 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그 직후 임의로 활동을 중단해버렸다. 그는 자신이 주력할 곳은 근우회가 아니라 학교, 교회, YWCA 등 기독교계라고 생각한 것 같다.

<반민족행위의 시점>
- 김활란의 친일행위는 1937년 이화여전 부교장 시절부터 시작된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식민지 조선을 전쟁기지로 만드는 시점이다. 김활란은 애국금채회(愛國金釵會)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일제의 침략전쟁에 금비녀를 뽑아 바치는 이 단체에 가담한 것은 명백한 반민족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이후 그의 이름은 조선부인연구회,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조선교화단체연합회,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조선언론보국회 등 일제가 만든 온갖 단체의 간부직에 가장 자주 오르내렸다.
그런 가운데 1938년 6월 20일 이화여전과 이화보육의 4백명 처녀들로 '총후보국을 내조'한다는 애국자녀단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부인총궐기촉구강연회, 시국부인강연회, 학병권유계몽독려반 강연 등 전국을 돌며 일본의 침략전쟁에 협조하는 연설을 하고 다녔다. 야마기 카쓰란(人城活蘭)이라고 창씨개명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1938년 6월 8일 조선 YWCA를 일본 YWCA에 통합시키는데 앞장섰다. 이 때 회장이 김활란이었다.

<학병, 징병을 권유>
-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이후 일제는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지원병제에서 나아가 징용, 징병, 정신대 등의 강제 연행을 시작하였다. 동시에 식민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선전하기 위해 각종 친일단체를 결성하여 우리 민족의 정신까지 앗아가려는 온갖 책동을 다하였다.
그는 각종 친일단체의 간부로서 부인궐기촉구강연, 결전부인대강연, 방송 등을 통해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내선일체, 황민화 시책을 선전하며 일반 여성이나 여학생들에게 '어머니나 딸, 동생으로서' 징병, 징용, 학병 동원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였다. 확장되는 전선을 일본인 군인으로만 막을 길이 없자 전면적인 징병제를 실시하여 조선의 남아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삼고자 한 결정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감격하였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귀한 아들을 즐겁게 전장으로 내보내는 내지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반도여심 자신들이 그 어머니, 그 아내가 된 것이다……. 이제 우리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 알 수 없다.'('징병제와 반도 여성의 각오', 신세대 1942. 12)

'학도병 출진의 북은 울렸다. 그대들은 여기에 발맞추어 용약(勇躍) 떠나련다! 가라, 마음놓고! 뒷일의 총후(銃後)는 우리 부녀가 질 것이다. 남아로 태어나서 오늘같이 생의 참뜻을 느꼈음도 없었으리라. 학병제군 앞에는 양양한 전도가 열리었다. 몸으로 국가에 순(殉)하는 거룩한 사명이 부여되었다.'('뒷일은 우리가', 조광 1943.12)

이밖에도 그는 신문, 방송, 강연을 통해 일제의 앞잡이로서 내선일체, 황국신민화 정책을 선전하며 우리의 젊은이들을 징병, 징용 학병으로 내보내는데 앞장을 섰다.

1944년 악성 안질에 걸려 실명할 우려가 있다는 의사의 말에 "남의 귀한 아들들을 사지(死地)로 나가라고 했으니, 장님이 되어도 억울할 것 없지… 당연한 형벌"이라고 말하였다 한다.(김옥길의 '김활란 박사 소묘')

해방 후 김활란은 대부분의 친일경력을 가진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그가 택한 정치세력은 '친미반공'을 내세운 정치권력과의 밀착이다. 그는 단 한번도 독재권력과 맞서 싸운 적이 없다. 오히려 정권과 '밀월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의 수족으로 활동하였다.

김활란은 여성 권력추종똥개다. 그러나 그 역량은 한국근대사가 굴절을 겪는 주요 고비마다 다수의 한국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소수의 지배권력을 위해 발휘되었다.
경찰이나 군대, 행정기관에 소속되어 항일운동가와 민족성원을 탄압한 사람들과는 다르지만, 문화, 교육가로서 일제에 협력한 그의 역할은 결코 가벼울 수 없는 만큼 그가 민족사에 남긴 오점은 분명히 해야 한다.

<종별 건명 또는 연재>

- 1941년 7월 5일 '애국정신에 빛나는 총후의 각오'
- 1941년 9월 19일 '부인 생활정의 강연' : '전조선 6반을 파견'
- 1941년 11월 26일 '국민총력중앙이사회석 담' : 담화
- 1943년 5월 5일 '가정도 전장이다' : 방송
- 1943년 6월 27일 '남자에게지지 않게 큰 결의를 갖고 있다'
- 1943년 8월 7일 '적 격멸에 일로 매진' : 매일신보 논문
- 1944년 6월 27일 '감격과 중한 책임'

<인용저서>
-친일파 99인, ②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275~283p), 저술자 : 강정숙(영남대 강사, 여성학,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친일파 99인, ③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부록2 일제하 친일단체 및 기관 소속 주요인명록, 268, 269, 279p)
-친일파 죄상기, 김학민 정운현 엮음, (민족정기의 심판 : 47, 48p, 친일파 군상 : 354, 386, 387, 431, 442, 443, 447, 448, 452p)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찬(108~109p)

황신덕(黃信德)의 주요경력 및 친일경력

-1889년 평양 생
-숭의여학교졸업
-1921년 일본와세다대학 수료
-1926년 귀국 후 시대일보, 중외일보기자
-1927년 근우회 창립회원으로서 활동
-1934~40년 동아일보 신가정부 기자
-1938년 5월 24일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여성단체연합 시국강연을 한때 '비상시국과 부인보국'이란 연재로 강연
-1940년 경성가정여숙을 창립, 해방 후에 중앙여자중학교로 승격시켜 교장에 취임
-1940년 10월 16일 발족된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생부 후생위원
-1941년 9월 15일 내지 1주일 예정으로 여류 지명인 총동원 하는 전위 여성 격려대를 전선 각지로 파견하여 강연회 혹은 좌담회, 일반부인층과 여학교생도들을 모아놓고 '일본여성의 갈길'로 강연 또는 좌담을 한때 청주, 충주, 영동지역 연사로 활동
-1941년 9월 16일 매일신보에 '폐품을 재생산하여 국가에 필요하게 쓰자'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
-1941년 10월 22일 부민관에서 결성된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1941년 12월 20일 2시 동양극장에서 시국부인대강연회 연사
-1941년 12월 22일 6시 영등포연예관에서 열린 시국부인 대강연회 연사
-1942년 1월 5일 발족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1943년 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생위원
-1948년 과도정부 입법위원에 선임 됨
-1952년 여성문제 연구회 창립회장
-1956년 가정법률상담소 창설이사장
-1961년 학교법인 추계학원 이사장
-1962년 문화훈장 대통령장을 받음
-1970년 3.1절 여성동지회 부회장에 취임
-1971년 범태평양 동남아 여성협회 회원으로 활동
-1983년 사망

황신덕의 친일행적

<<제자를 근로정신대로 보낸 여성교육자>>
<친일성향이 강했던 중앙여고 교장>


일장기 머리띠를 두른 제복의 여학생이 선생님들과 함께 찍은 한 장의 기념사진, 이 사진은 1943년 한 여학생이 정신대로 차출되어 가기 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찍은 것으로 사진속의 교장은 황신덕, 부교장은 박순천이다.

1970년 어느 해 황신덕 교장의 병환 소식을 듣고 찾아가 "'선생님, 그때 절 정신대로 보내신 것 너무하셨어요. 선생님 가슴 아프라고 하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때 왜 그렇게 하셨어요?' 라고 하였더니 선생님께서 '그래, 네 말이 맞다. 나도 그 일을 후회하고 있네'라고 처음으로 사과의 말씀을 하시더군요" 라고 증언하고 있다. (뉴스메이커 19992.6.5)

그러나 황신덕은 우리나라 여성운동의 권력추종똥개 중 한 사람이다.

<각종 친일단체의 간부와 중책을 맡으며 시국강연 강사로 활약>
초기에는 애국계몽적 여성운동을 이끌어 온 황신덕은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좌우세력이 협력하여 건설한 '근우회' 활동을 그만 둔 이후부터는 적극적인 친일파 여류인사 중의 한사람으로 되었다.

1938년 6월 24일 종로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부인들을 대상으로 보국을 주제로 한 시국강연회를 개최하고 국방헌금을 모금하였는데, 그 자리에 연사로 참석하여 '비상시국과 가정경제'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또한 1941년 9월 16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폐품을 재생산하여 국가에 필요하게 쓰자'라는 논설은 겉으로는 절약정신을 주장하는 것이지만 결국에는 가뜩이나 굶주리고 피폐해진 민중들을 쥐어짜서 일제의 전시품을 동원하자는 것이었다.(참조: 송금선의 바른 식생활)
'전시생활과 부인도덕'이라는 주제의 좌담이 매일신보 1942년 1월3~10일자에 5회에 걸쳐 연제되었는데, 황신덕은 김봉희(金鳳姬), 임효정(林孝貞), 아라이(新井昌子) 등 6명과 함께 착석하였다.
좌담 참석자들은 '새 시대의 도덕은 개인에서 공중도덕으로', '소극적인 것을 버리고 정에서 동의 도덕으로' 등을 논하고 있으나 중심 내용은 전시에 국가를 위하여 여성들이 적극 호응하고 나서자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매일신보 1941년 12월 25일자에는 '정전(征戰)을 뒤에서 지키는 맹서-근로의 정신'이라는 제목으로 근로정신의 신명을 갖고 책임을 다하자는 취지의 글을 실었다. 또 '어머니의 책임이 중대'라는 글에서는 "해군 지원병제도를 실시한 우리는 구군신(九軍神)과 같이 한 번 나라를 위해 죽을진대 '죽음'을 생각지 않는다는 그러한 위대함을 길러내는 어머니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라고 강변하고 있으며, '전위 여성격려대'로 청주, 충주 영동 지방을 순회하며 강연하고 다녔다.

-그는 글이나 강연을 통한 활동뿐만 아니라 각종 친일단체의 간부, 임직원을 맡아 활동하였다. 황신덕은 1940년 19월에 결성된 '국민총력 조선연맹' 후생부 위원직을 맡았으며, 1941년 10월 22일에 친일세력을 총망라하여 조직된 '조선임전보국단' 에도 몇 안 되는 여성 평의원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또 1942년 1월 5일 조선임전보국단 산하기관으로 총후부인 진영을 망라한 '조선임전 보국단 부인대'가 발족되었는데 황신덕은 그 단체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징병, 학병, 해군지원병 제도가 잇따라 실시되던 1943년 무렵부터는 지원병과 학병으로 나갈 것을 강요하는 데도 앞장섰다.

<근우회에서 각종 친일단체의 임원으로 활동>
-황신덕은 기자로 재직하면서 애국계몽운동계열의 여성운동을 주도하였다. 1927년 여성운동과 항일운동의 일원화라는 목표 아래 여성운동계가 망라하여 근우회를 창립하였을 때 황신덕은 21명의 중앙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중책을 맡았으며, 중앙기구의 부서에서 교양교육부 상무직을 역임하였다.

1928년 제1회 대회에서 지방과 해외지사의 대표가 추가되어 31명으로 중앙집행위원회가 구성될 때에도 황신덕은 다시 집행위원회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근우회가 해체되고 나서 일제의 조선인 탄압정책이 더 혹독해지고 노골화되자 친일인사로 변모하게 된다.

-중앙여고의 전신인 경성가정의숙을 1940년 10월 37명의 신입생으로 시작하였다. 그런데 황신덕은 이 시절 이미 각종 친일단체에 깊이 관여하여 일제에 적극 협력하는 인사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1940년 37명으로 세운 학교는 1945년 1월에 사립학교 규정에 의해 중앙여자상과학교로 인가를 받게 된다.

1983년 11월 22일 사망하기까지 황신덕은 추계학원 이사장으로 있었으며 수많은 여성단체에 관여하였고, 3.1 여성동지회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인용저서>
-친일파 99인, ②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289~294p), 저술자 : 장하진(충남대 교수, 사회학)
-친일파 99인, ③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부록2 일제하 친일단체 및 기관소속 주요인명록 268~270p)
-친일파 죄상기, 김학민 정운현 엮음(민족정기의 심판 : 39, 54p)
-민족문화대백과사전 25,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찬(484p)

고황경(高凰京)의 주요 경력 및 친일경력


-1909년 서울 생
-1928년 일본 도지샤(同志社) 여전 영문과 졸업
-1931년 일본 도지샤(同志社) 여전 법학부 졸업
-1937년 미국 미시간대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 받음
-1937년 1월 총독부 학무국 알선으로 '조선부인문제연구회'가 조작됐을 때 중요한 핵심적 역할 담당
-1937년 8월 6일 조선중앙정보위원회의 권유로 결성된 '애국금채회(愛國金釵會)'의 간사
-1938년 6월 8일 조선여자기독교청년연합(YWCA)회에서는 위원회를 개최하고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세계기청으로부터 퇴맹키로 결의하는 동시, 내선일체란 단일국민 이념 하에 일본 YWCA에 가맹키로 했는데 김활란과 함께 경성부 실행위원(매일신보 1938년 6월 9일 발표)
-1938년 9월 12일부터 '조선부인문제연구회'의 활동을 선전 계몽하기 위해 13도 순회 강연시 홍승원(洪承嫄)과 함께 전남북을 맡아 강연
-1940년 10월 16일 국민총력조선연맹이 발족됐을 때 참사가 됨
-1941년 9월 7일 '임전대책 대연설회'를 마친 후 임전대책협의회에서는 '총후봉공(銃後奉公)은 채권으로부터'라고 외치며 가두판매했는데 그는 신흥우, 주요한 등과 함께 서대문에서 채권을 판매
-1941년 10월 17일 시국부인 대강연회가 용산 인보관에서 열렸을 때 연사로 강연
-1941년 10월 30일부터 1주일간 全鮮 39개소에서 '부인생활정의' 강연회를 개최했는데 제 2반으로 충청도 지방(청주, 대전, 충주, 공주, 강경)으로 속해 강연
-1942년 1월 5일 조선임전보국단의 산하기관으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가 발족됐을 때 지도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
-1943년 8월 5일자 매일신보에 '징병 감사와 우리의 각오, 건군 정신에 투철'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

-1945년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장
-1946~48년 미군정에서 보건후생부 부녀국장
-1949~50년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연구활동
-1960~63년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참석
-1958~86년 대한어머니회 회장
-1961~84년 서울여자대학 학장
-1963~67년 걸스카우트 단장
-1988년 학술원 종신회원
-1989년 서울여대 명예총장
-2000년 사망

고황경의 친일행적

<<황도정신 선양에 앞장선 여성 사회학자>>
<박사학위 받고 귀국 직후부터 식민지 사회교육에 가담 협조>

-고황경은 일제시기에 일본과 미국의 대학에 유학했으며 일본에서는 영문과와 법학부를 졸업했으며, 1937년 미국 미시간대학 대학원에서는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그는 이화여전 교수로 재직하게 되나 1937년부터 바로 친일집단에 가담 협조하는 행적으로 남기고 있다. 일제가 식민지 정책을 강화하는 사회교화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각종 어용단체를 조직토록 했다.

그 일환으로 1937년 1월 총동부 학무국 알선으로 '조선부인문제연구회'가 조직됐다. 이 단체는 총독부의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책'에 호응하여 '가정보국운동으로서의 국민 생활의 기본양식'이라는 것을 제정했다.
전시에 맞게 가정생활을 간소화하는 것이었는데, 이 단체는 신진 여성을 총망라해 매월 마지막 토요일을 회합일로 정하고 생활개선부와 수양부를 두어 활동했다. 여기서 고황경은 중요한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 단체의 활동을 선전 계몽하기 위해서 11명으로 구성된 순회강연반을 결성하여 1938년 9월 12일부터 13도를 순회강연했으며, 그는 전남북을 맡아 강연했다.

1937년 1월 총독부 사회교육과가 주동해서 '방송선전협의회'가 발족됐는데 이 역시 '일본 국민으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 즉 내핍과 절약을 전쟁을 이겨내고 신명을 천황께 기꺼이 바치게 한다는 사회교육을 수행하게 할' 목적으로 수양강좌, 부인강좌, 상식강좌 등의 방송강좌를 실시했다. 여기에도 고황경은 부인강좌를 맡는 역할을 했다.

<애국금채회 간사로 활약>
-조선부인문제연구회에서 활약하던 고황경은 '애국금채회'의 간사를 맡게 됐다. 1937년 8월 16일 조선중양정보위원회의 권유로 귀족의 처와 중견여류를 망라해서 결성된 이 단체는 한마디로 말해서 금비녀 금가락지를 뽑아 일제의 국방비로 헌납하자는 전쟁협력단체였다.
동시에 애국금채회는 '황군원호'를 목적으로 하면서 황군의 '환 송영, 총후가정의 위문 격려, 총후가정의 조문, 일반 조선부인에 대한 황군원호의 강화 및 국방비의 헌납 등을 사업계획을 정했으며 육군병원 방문, 위문금 전달, 국방헌금, 장병위문을 실시했다.

1939년 9월 10일 '동양지광' 주최의 '내선일체 좌담회'에 참여했으며 1941년 '채권가두유격대'에 서대문대로 편성되어 우체국 앞에서 신흥우, 주요한 등과 함께 채권을 판매했다.

1942년 1월 5일 조선임전보국단의 산하기관으로 이른바 총후부인 진영을 총망라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가 발족됐는데 고황경은 이 단체의 지도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1943년부터는 지원병과 학병을 권유하는데도 앞장섰다. 이러한 활동의 일환으로 매일신보 1943년 8월 5일자에 '징병감사와 우리의 각오, 건군정신에 투철'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해방이 되자 고황경은 다른 친일 여류명사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자기반성 없이 분단 조국의 교육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또 미군정하에서는 보건후생부 부녀국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1960~63년에는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참석했으며, 1961~84년 서울여대 학장, 학술원 종신회원을 역임하였으며, 대한민국문화대상 국민포장 동백장, 5.16 민족상을 수상했다.

<인용저서>
-친일파 99인 ②,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284-288p), 저술자 : 장하진(충남대 교수. 사회학)
-친일파 99인 ③,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부록2. 일제하 친일단체 및 기관 소속 주요 인명록, 270p)
-친일파 죄상기, 김학민 정운현 엮음, (민족정기의 심판: 35, 53p, 친일파 군상 : 391, 443, 445p)

박인덕(朴仁德) 주요경력 및 친일경력

일본명 永河仁德
-1896년 평남 용강 생
-1916년 이화학당 대학과 졸업 동시에 이화학당 기하 체육 음악 교사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에서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학생을 선동하였다는 죄목으로 붙잡혀 4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름
-1919년 11월 대한애국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름
-1922년 배화여고 교사로 교육계에 복귀하면서 신문 잡지 강연을 통해 여권신장과 여성계몽운동을 위하여 활동
-1923년 9월 감리교 여자신학교에서 금주 금연운동을 주요 활동으로 하는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를 발족하여 회장으로 활동
-1921~26년 배화여고와 여자신학교에서 영어 음악을 가르침
-1926년 미국 조지아주의 웨슬레안대학에 유학해 사회학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컬럼비아대학 사범대에서 교육학 문학석사를 받음
-1928년 2월 뉴욕에서 김마리아, 황애덕(黃愛德) 등과 민족주의 단체인 근화회(槿花會)를 발기하여 활동
-1935년 '농촌교역지침'을 발간해 농촌계몽운동
-1941년 덕화여숙(德和女塾) 설립 일에 검사정 야마사와(山澤) 및 나가사키(長崎), 구라시게(倉茂) 보도부장, 이화여학교 신도순(辛島純 : 원 이름은 辛鳳祚) 등이 축사를 읽었고 교사진도 녹기연맹의 쓰다(津田節子), 청화여숙 교사가 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淸田美智子, '덕화여숙을 방문하고' 綠旗 1941.6)
-1941년 8월 25일 부민관에서 임전대책협의회를 개최하였는데 실천위원으로 선출됨
-1941년 8월 30일 '나서라 증산 건설(절대적인 국가 요청)'이라는 요지로 담화문 발표
-1941년 9월 4일 부민관에서 임전대책연설회를 개최하였을 때 '승전의 길은 여기에 있다'는 연제로 강연
-1941년 임전보국단 준비위원회 준비위원
-1941년 9월 7일 임전대책강연회를 끝마친 임전대책협의회에서는 '이로써 실천으로!'라는 슬러건을 세우고 채권가두유격대로 나섰는데 박인덕은 윤치호(尹致昊) 등과 함께 종로대에 나섰다
-1941년 11월 15일 창립된 조선언론보국회 이사로 선출됨
-1941년 12월 18일 동성상고에서 시국부인 대강연회가 열렸을 때 모윤숙(毛允淑)과 함께 강연
-1941년 12월 20일 '정전(征戰)을 뒤에서 지키는 맹서'라는 요지로 매일신보에 논문 발표
-1941년 10월 22일 부민관에서 결성된 조선임전보국단 결전부인대회를 결성하고 오후 6시 강연회 때 사회를 맡아 '우리 1천5백만 여성은 당당한 황국여성으로서의 천황폐하께 충성을 다할 천재일우의 시기입니다' 등의 내용으로 개회사를 함
-1942년 1월 5일 결성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1942년 2월 15일 영(英) 동양침략의 아성 싱가폴 공략 대강연회에서 '동아여명과 반도여성'이라는 연제로 강연
-1943년 조선교화단체연합회 부인계몽독려반
-1945년 6월 8일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1980년 사망

박인덕의 친일 행적

<<황국신민이 된 여성계몽가>>
<여성계몽가로서 화려한 활동>

-박인덕은 1916년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하였다. 이 시기에 이화학당 대학과는 국내 최고의 전문과정이었고 졸업생은 이화학당 내에서만이 아니라 조선사회의 주목과 기대를 한 몸에 받기 마련이었다. 박인덕은 졸업과 함께 이화학당에서 기하 체육 음악을 맡아 가르쳤다.
그는 이 시기에 계몽운동적 차원에서 사회참여 활동도 하였다. 그러다가 3.1 독립만세운동 때에는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학생을 선동하였다는 죄목으로 경찰에 연행되어 4개월 동안 감옥생활을 했다. 그리고 출옥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해 11월 또한 대한애국회 사건으로 투옥되는 고초를 겪었다.

결혼 후 박인덕은 1923년 9월 감리교 여자신학교에서 금주 금연운동을 주요 활동으로 하는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를 발족하여 회장으로 활동하는 등 사회활동을 계속하였다. 1921년부터 1926년 9월까지 배화학교와 여자신학교에서 영어와 음악을 가르치다 배화학교 외국인 교사의 협조로 1926년 미국 웨슬리안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이 대학에서 사회학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컬럼비아 대학 사범대에서 교육학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미국에서도 사회활동을 계속했는데 민족주의 단체인 근화회에서 활동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근화회는 1928년 2월 뉴욕에서 김마리아, 황애덕 등 여자유학생들의 발기로 조직된 것으로 출판이나 순회강연 등을 통해 국내정세를 외국인에게 소개하여 조국광복에 기여하려는 단체였다.

1931년 귀국 후 그는 교사 모임으로 조직되었던 망월구락부를 황애덕, 최활란과 더불어 '단정한 직업을 가진 여성'들의 모임인 조선직업부인협회로 개편하여 여성들을 위한 경제학 강연을 여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33년에는 농촌 부녀를 위한 이동학교를 개설하기도 했으며 감리교 농촌 부녀지도자 수양소의 일을 하기도 했다.

1935년에는 '농촌교역지침'을 발간하여 종교 활동의 일환으로서 농촌계몽운동을 하였다. 그의 활동은 주로 농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파악하고 행해졌으며 그들의 처지를 개선하는 것에 주요한 관심을 기울였고 무지로부터의 해방이 생활개선의 주요 수단이라고 보았다.

이처럼 일제에 대한 저항보다는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합법적 공간에서 운동하는 그의 성향이 훗날 반민족행위로 나아가는데도 거리끼지 않게 만드는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녹기연맹(綠旗聯盟)의 지원을 받아 덕화여숙을 설립하여 급격한 변신>
-미국에서 조선민족의 존재를 알리며 민족주의 단체에 참가했던 그가 어떤 계기로 반민족행위자가 되었는가. 이에 대한 분명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정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1935년경부터는 일제가 기독교에 대해서도 신사참배니 하는 각종 시책을 강요하여 강력하게 통제하였다. 이때부터 국내의 민족주의계 인물들 대부분이 이미 일제에 대해 투쟁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 되었다.

-박인덕의 친일행각은 덕화여숙의 설립에서 시작된다. 덕화여숙은 녹기연맹 부설 청화여숙을 본 따 자매학교로서 만들어졌다. 후대의 기록에 의하면 덴마크의 실업학교를 본보기로 삼은 것이라고 하나 덕화여숙은 음으로 양으로 녹기연맹의 도움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박인덕이 녹기연맹과 관련을 갖게된 것은 일본어를 배우게 되면서부터이다. 녹기연맹의 쓰에(須江愛子)에게서 배우기 시작하여 하시키타(橋北町)의 '국어강습회'를 거쳤다. 이러한 가운데 녹기연맹은 자기 끄나풀로서 박인덕을, 박인덕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줄 수 있는 학교 설립의 지원자로서 녹기연맹을 선택한 셈이다.

1941년 4월 18일 덕화여숙 설립일에 검사정 야마사와 및 나가사키, 구라시게 보도부장 등이 축사를 하였고 교사진도 녹기연맹의 쓰다, 청화여숙 교사가 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매일 아침마다 '황국신민의 서사'를 읊고 청화여숙과 조선신궁에 합동 참배하는 일종의 녹기연맹의 부설학교와 같은 것이었다.

-1941년 8월에는 임전대책협의회의 결성에 위원 자격으로 참여했으며 9월에 김동환, 신태악, 최린 등과 함께 '임전대책협의회'에서 '승전의 길은 여기에 있다'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또한 전쟁비 조달을 위한 채권가두유격대로서 이숙종(李淑鍾), 송금선(宋今璇)과 함께 참가하였다.

그가 그 당시 행하고 다닌 친일행위들은 1941년 12월 20일 매일신보에 실린 '정전(征戰)을 뒤에서 지키는 맹세'라는 글을 통해 명확히 드러난다. "대체 왜 영 미 하고 싸우게 되나를 잠깐 생각합시다...... 중대한 것 중의 하나는 남의 구역에 영 미가 침범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대동아에 사는 전 민족에게 끼치는 일이니까 우리는 정의를 위하여 굳게 싸우려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자신이 공부하고 강연하고 다녔던 미국을 적국으로 돌리고 자신의 조국을 짓밟고 있는 일본 제국주의를 비호하여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을 '정의의 전쟁'으로 미화하였다. 그는 조선임전보국단의 평의원과 그 부인대의 지도위원으로서 1941년 12월 27일 결전부인대회에서 사회를 맡아 "지금은 우리 1500만 여성이 당당한 황국여성으로서 천황폐하께 충성을 다할 천재일우의 시기입니다. 이에 우리 반도 여성을 대표로 하여 '결전부인보국회'를 조직하자"고 하였다.

그리고 전쟁이 소모전으로 되면서 군인의 충원이 급해지자 일제는 징병제를 계획하고 학병을 끌고갔다. 이를 위해서 우선적으로 선전대원으로서 각종단체를 동원하였다. 이때 박인덕은 '새 어머니 될 우리의 감격과 포부'를 논제로 한 좌담회에 참석하였고 학병을 동원하기 위해서 조선교화단체연합회 부인계몽독려반으로 파견되었다. 이외에도 조선언론보국회의 이사를 맡는 등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각종 반민족단체나 각종 토론회 강연회의 연사로서 그리고 사회자로서 맹활약하였다.

<해방 후 반탁 반공 연사로 활약>
-해방 전에는 미국을 비난하던 입으로 박인덕은 일제가 패망하고 미군이 들어오자 돌변하여 미군정에 밀착되어 미소관계의 냉전이 시작되는 틈 속에서 다시 변신을 꾀하였다. 1946년 신탁문제를 둘러싸고 반탁운동체가 총집결될 때 여성단체도 독립촉성애국부인회로 결집되었다. 박인덕은 독립촉성애국부인회의 전국 부인대회에서 '민주주의와 여성'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는가 하면 회의의 사회자로 맹활약을 하고 정보부장으로 선임되어 전국적 무대에 재등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미군정청에 의해 제1회 국제부인대회에 남한대표로 미국에 파견되었고 미국에서 반탁여론을 조성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이후 미국에서 저술 강연에 열중하여 자서전적인 책 2권과 또 한권의 책을 썼다. 그 인세와 강연료 등을 기금으로 1961년 이후 인덕실업전문대학 등을 설립하여 인덕학원 이사장이 되었다. 그리고 일제시기 학교 설립자가 되었던 대부분의 인물들이 학교를 그들의 자손에게 물려준 것처럼 그 역시 딸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인용저서> -친일파 99인, ②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295~302p) 저술자 : 강정숙(영남대 강사. 여성학,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친일파 99인, ③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부록2 일제하 친일단체 및 기관소속 주요인명록 270p)
-친일파 죄상기, 김학민 정운현 엮음(민족정기의 심판 : 33~35,39,47p, 친일파 군상 : 366, 441, 445, 447, 451, 466p)
-친일변절자 33인, 무크 친일문제연구 제2집, 편집위원 : 김삼운 임해봉 김승태 김순석 정운현 (92~100p)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찬(59~60p)

송금선(宋今璇)의 주요 경력 및 친일사항

일본명(福澤玲子 후쿠자와 레이코)
-1905년 경기도 출생
-동경여자고보(東京女子高普)
-덕성여자실업학교장

-1940년 10월 16일 발족된 국민총력조선연맹 연성부 연성위원
-1941년 9월 1일 '전위여성 격려대'라는 제목으로 천안, 대전, 공주 각지로 순회강연
-1941년 9월 7일 임전대책연설회를 끝마친 임전대책협의회에서는 '이로써 실천으로!'라는 슬로건을 세우고 채권가두유격으로 나섰는데 송금선은 정교원(鄭僑源), 이돈화(李敦化), 김사연(金思演) 등과 함께 경성역대로 나섰음
-1941년 11월 15일 창립된 조선언론보국회 평의원
-1941년 12월 9일 '최저국민생활은?'이라는 담화를 경성일보에 발표
-1941년 9월 전위여성격려대가 전선(全鮮) 각지로 파견되어 부인층과 여학교 생도들을 모아놓고 '일본이 갈 길'을 주제로 강연회, 혹은 좌담회를 했는데, 송금선은 천안, 대전, 공주에 파견됨
-1942년 1월 7일 저명인사들의 방송에서 '생활전에도 이기자'라는 제목으로 방송
-1943년 1월 현재 국민총력조선연맹 연성부 연성위원

송금선의 친일 행적

<채권가두유격대>
-1941년 9월 7일 임전대책협의회에서는 '이로써 실천으로!'라는 슬로건을 세우고 동회원 70여명을 총동원하여 채권가두 유격으로 나섰다. 70여명을 시내 11개 장소로 배치시켜 '총후봉공은 채권으로부터'라고 외치며 추태를 연출했는데 송금선은 정교원, 이돈화, 박기효(朴基孝), 김사연, 김사연의 부녀 손홍원(孫弘遠)과 함께 경성 역대로 나서서 가두 판매했다.

<국민정신선양 각도 강연 행각>
-1939년 8월 5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서는 이달과 내달 중에 각 도로 강사를 파견하여 국민정신 선양에 관한 순회강연을 열기로 됐다. 강연할 연제는 시국진전에 대한 인식과 결심, 총동원 운동의 본위, 백억저축생활 쇄신에 관한 것들이며 강사들은 남자 18명, 여자 8명으로 조선 각처로 강연을 다니리라고 한다. 여자부는 송금선, 조기홍(趙圻烘), 이숙종, 손정규(孫貞圭), 홍승원, 유각경(兪珏卿), 차사백(車士伯), 임숙재(任淑宰)이다.

<부인궐기촉구 강연>
-1941년 9월 19일 총독부 학무국 연성과내에 있는 조선교화단체연합회에서는 12월 2일을 기해 저명한 부인강사를 각지에 파견해 전국 인식과 징병징용제의 취지를 철저히 하는 순회강연을 하기로 했는데 송금선은 경기도 강사였다.

[바른 식생활]
새삼스럽게 절미(節米) 절식(絶食)이라니 시대에 뒤떨어진 듯한 느낌입니다마는, 금년이야말로 결전(決 戰)의 해라, 다시 한 번 우리의 식생활을 반성해 보는 것도 전혀 무의미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대체로 우리 조선사람은 너무 덮어놓고 과식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쌀을 너무 먹어 왔어요. 아침이 건 점심이건 저녁이건 저 오들오들한, 가장 소화하기 어려운 쌀의 찌거기인 백미만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침부터 눈이 퀭해서 잠이 오는 것도 당연하지요.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아슬아슬했다는 기분 이 안 드는가요?

부식물이란 것은 단지 형식적으로만 먹어 왔어요. 그러고서도 모두들 영양불량·소화불량이 걸려서 죽어 버리지 않은 것이 이상해서 못 견디겠어요. 이제야말로 정말로 우리들의 식생활은 바른 궤도로 들기 시 작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제 한 발짝만 더 각자가 열심히 연구하면 훌륭한 성과가 얻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침은 가족 전체가 모두 죽으로 정해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 편이 건강에도, 두뇌활동에는 좋다는 것이 저 한사람의 경험은 아니겠지요. 세계에서 가장 요리법이 발달했다는 중국사람들 역시 아침은 죽을 마셔 버리면 그만입니다. 점심인 도시락과 죽을 따로따로 만들면 품이 먹힌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런 걱정은 필요 없습니다. 지금까지 끓이던 나물국에 쌀을 넣어서 끓이면 훌륭한 야채 스프 겸 나물죽이 되는 것입 니다. 다른 반찬은 전부 필요 없어요. 이렇게 하면 별로 시간도 안 걸립니다. 물론 어른들은 아침을 걸러 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루 세끼는 전혀 습관일 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이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이면 현재 있는 것으로 기쁘게 이용을 하는 습관을 만들어야 하 겠습니다. 예를 들면 요즘처럼 비교적 야채가 풍부할 때는 야채만으로 때워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침 같으면 쌀은 전혀 없이, 야채만으로 된 스프 한 그릇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옛날의 우리들의 조반을 생각하면 허전할는지 모르지만, 바로 이런 점에서 전쟁하는 국민의 강한 의지와 예리한 이성과 끊임없는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쿵저러쿵 추억을 해도 소용이 없는, 낡은 것에의 미련을 깨끗이 끊어버리고 보다 건강한 지성(知性)으로써 힘차게 새로운 세대를 쌓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꿈에라도 지금은 전시니까 좀 참자라든가, 전쟁만 끝난다면 하는 생각을 갖는다면, 그건 아주 잘못 생각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식생활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잡 혀지려 하는 것입니다. 이를 사려물고서라도 확고한 훈련을 해서 바른 식생활을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어 야만 합니다. 절대로 아이들에게는 어른들인 우리의 나쁜 습관을 배우게 하거나 해서는 안됩니다. 그네 들이야말로, 어떤 난관에 봉착하더라도 태연하게 야채면 야채만으로, 물이면 물만으로라도 영양불량에 안 걸릴 체질과 습관을 몸에 붙여주지 않으면 다음 세대를 짊어지고 나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야말 로 전국민이 함께 바른 식생활의 연성(鍊成)에 매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半島女性 責務도 크다 -福澤玲子 女史-
'정말이에요? 이렇게 반가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하면서 덕성여자실업학교 교장실에서 福澤玲子 씨는 기쁨에 못이기는 얼굴로 징병제도의 감격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직 감격이 가슴에 벅차서 말이 잘 아니 나옵니다. 오늘이야말로 반도 역사를 장식하는 가장 엄숙하고 도 광영에 빛나는 날일 것입니다. 오랫동안 바라고 바랬던 것이 이제야 우리들에게 찾아왔으니, 그저 힘 껏 외쳐서 이 기쁨과 감격을 2천 4백만이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제는 어디를 가든지 정말로 황국신민이 완전히 되었다는 자랑과 의무를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것으로 인하여 반도 민중의 시국에 대한 태도는 더욱 철저하여져서, 내 아들 내 동생을 나라에 바쳤다는 절실한 애국심이 북돋우어질 것임에 따라, 1천만 반도 여성들도 군국의 여성으로서 그 책임의 중대함을 더욱 굳세게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앞으로는 반도 지식여성들은 제1선에 서서 훌륭한 군국의 어머니가 되기 위하여 더욱 힘써야 하며 여학교의 생도들도 어디까지 군국의 어머니로서 교육하여야 될 것입니다.'

<용서될 수 없는 송금선의 범죄>
1952년 덕성여대 차미리사 여사가 이사장직을 사임한 이후 그 뒤를 이어 이사장이 된 것은 송금선씨의 부친, 송우영씨였다. 송우영씨 다음으로 이사장직에 오른 것은 송금선씨의 남편, 박준섭씨였으며, 그가 사임하고 난 후에는 송금선씨 본인이 이사장이 되었다. 덕성학원이 완전히 송금선 일가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송금선 아들 박원국 작태)
덕성학원을 장악한 송금선 일가가 한 일 중 하나는, 덕성여대에 남은 차미리사 여사의 흔적을 지우는 일이었는데, 이는 송금선씨가 1940년에 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덕성여자실업(근화여학교)교장이 되어, 학도병 모집글을 쓰고 창씨개명을 하는 등 친일에 힘썼던 부끄러운 과거를 왜곡, 미화하기 위해서였다.

<인용저서>
-친일파 죄상기, 김학민 정운현 엮음, (민족정기의 심판: 35, 54, 130p, 친일파 군상 : 391, 437, 450, 454p)

모윤숙의 주요 경력 및 친일사항

- 함경남도 원산시에서 모학수의 차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 모씨[1] 이고, 원적지는 평안북도 정주군이다.
-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문학과(영문학) 선과를 수료
그녀의 작품 렌의 애가는 김기영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다.

모윤숙은 1941년 12월 "매일신보"가 주최한 시국부인대 강연회에 참가, 이 강연에서 총후부인의 가정 결전 체제를 갖출 것을 역설하며 경성부의 여러 강연장을 순회 했다,

같은달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간사로서 부민관 강당에서 열린 전시(戰時)가정부인 총동원을 목표로 한 조선임전보국단 결전 부인 대회에서 "여성도 전사(戰士)다" 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이 연설에서 온갖 향락성과 개인주의 관념에 찬 영.미식 생활을 비판 하는 한편 "우리는 높이 펄럭이는 일장기 밑으로 모입시다", 쌀도. 나무도. 옷도 다 아끼십시요, 나라를 위해서 아끼십시요 그러나 나라를 위해서 우리의 목숨만은 아끼지 맙시다, 아들의 생명 다 바치고 나서 우리 여성마져 나오라거든 생명을 폭탄으로 비꿔 전쟁마당에 쓸모 있게 던집시다, '대동아' 1942년 5월호)라며 전시의 도덕적인 여성상을 제시하면서 총후봉공(銃後奉公)의 소임을 다 할것을 주장했다,

모윤숙은각종 집회.자담회에 참석 하였으며, 다음과 같이 역설하기도 했다,
"일하는 부인의 마음가짐.처녀문제. 가정교육 문제등에 대해 의견을 말하고 반도부인의 결전 의식을 재촉" (경성일보 1943년 8월18일) 했다, 같은해 11월 조선총독부 학무국 연성과 내의 조선교화 단체 연합회가 육군 특별지원병 제도를 선전.선동하기 위해 전위 여성격려대를 조직하여 조선 각지에 파견하자. 모윤숙은 함흥. 원산. 북청지역 강사를 맡아 강연회와 자담회를 통해 "일본 여성의 갈길을 주장했다",

1938년 4월부터 육군특별지원병제가 실시되고 3년이 지난 시점에서 쓴 시(詩)에서 "눈은 하늘을 쏘고 그 가슴은 탄환을 물리쳐/ 대동양의 큰 이상 두팔 안에 꽉 품고 달리어 큰 숨 뿜는 정의의 용사/ 그대들은 이땅의 광명입니다/ 대화혼(大和魂) 억쎈 앞날 영겁으로 빛 내일/그대들이 나라의 앞잽이 길손/ 피와 살 아낌없이 내어 바칠/ 반도의 남아 회망의 화관(花冠)입니다,/ 라며 지원병을 찬양했다,

또 1943년5월 해군 지원병제도 실시가 결정되자 5월 27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시(詩)에 "아가야 너는 ㅡ 해군기념을을 맞이하여"에서 아가야! 조개잡기 즐겨 모래성을 쌓고/ 땅에서 서기보다 물에놀기좋/ 아하는 너 미더운 바다가/ 이제 오란다/ 이제 너를 부른다/ 해군모 쓰고 군복 입고 나오란다/ 대동아를 메고 가란 힘찬 사명이/ 넓은 바다 한 가운데서 너를/ 부른다/ 사나운 파도넘어 / 네 원수를 물리쳐라/ 너는 아세아의 아들/ 대양의 용사 란다"며 해군 지원병 참여를 독려 했다,

1943년10월 육군 특별 지원병 채용 시행 규칙이 공포되고 같은해 11월20일로 학병모집이 마감되게 되자 11월12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시(詩) "내 어머니 한 말씀에"서 "오냐! 지원을 해라 엄마보다 나라가/ 중하지 않느냐 가정보다 나라가 크지 않으냐/ 생명보다 중한 나라 그 나라가/ 지금 너를 나오란다 너를 오란다/ 조국을 위해 반도 동포를 위해 나가라/ 폭탄인들 마다하랴 어서가거라/ 엄마도 너와 함께 네 혼을 따라 싸우리라"는 어머니의 말과 "어머니여! 거룩한 내 어머니여! 찬 들에 구르거나 진흙에 파묻히거나/ 내나라의 행복을 위함이니/ 설워마소서/ 내가가면 아세아의 등불이되어/ 번개가 되어 광명이 되오리다"라는 아들의 말을 교차시키면서 애국 모자의 모습을 형상화 하기도 했다,

1941년12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뒤 일제가 1942년2월 말레이반도의 싱가포르를 점령하자 곧바로 2월21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시(詩) "호산나 소남도"에서 "2월15일밤! 대아시아의 거화(巨火)/ 대화혼의 칼이 번뜩이자/ 사슬은 끊기고/ 네몸은 한번에 풀려나왔다/ 처녀야! 소남도의 처녀야!/ 인제 사철 중얼거리는 물결 소리와/ 야자나무에 불리는 바람들이/ 네 가슴에 눈물을 가져오지 않으리라/........./ 소남도! 태양의 심장/ 길이 길이 잘 살아라"라며 일제의 침략전쟁을 '구미 맞서 일본이 주도해 싸우는 아시아 민족 해방전쟁'으로 미화 했다,

1943년12월 "신시대"에 발표한 시(詩) "어린날개ㅡ히로오카 소년 항공병에게"에서 " 고운 피 고운 뼈에/ 한번 새겨진 나라의 언약 /아름다운 이김에 빛나리니/ 적의 숨을 끊을때 까지/ 사막이나 열대나/ 솟아솟아 날아 가라/ 사나운 국경에도/ 험준한 산협에도 / 네가 날아가는 곳엔/ 꽃은 웃으리 잎은 춤추리라"라며 가미가제로 출격하여 희생한 조선인 소년 비행병 출신 하사관인 히로오카 겡야(廣岡賢宰.李賢載)이현재를 찬양햤다,

1942년 1월 "신시대"에 정월맞이 기념시로 발표한 " 동방의 여인들"에서 대일본제국의 여인의 참 모습을 기렸다, "비단치마 모르고 / 연지분도 ㅡ 다 버린채/ 동아의 새 언덕을 쌓으리라/ 온갖꾸밈에서/ 행복을 사려던 지난 날에서/ 풀렸습니다/ 벗어 났습니다/ / 들어 보셔요/ 저 날카로운 바람새에서/ 미래를 창조하는/ 우렁찬 고함과/쓰러지면서도 다시 일어나는/ 산 ㅡ 발자욱 소리를/ 우리는 새 날의 딸/ 동방의 여인입니다"

모윤숙! 이 같은 글을 낮짝이 간지러워서 어떻게 썼을까?
자기 일생에 마즈막까지 일본이 우리 금수강산을 짖밟고 짖이겨서 일본의 만행이 영원히 저질러 졌을때 "모윤숙은 일본 천황으로 부터 고관 대작의 칭호를 받고.날이 시퍼렇케 선 황금 장식의 닙본도를 하사받아서 절그렁절그렁 차고 다니면서" "하이 조센징 이리노 와 바라" 느그들은 영원히 나 모윤숙의 시종이 돼야 한다"고 거드름을 피우는 꼴불견의 세상을 꿈꿨을까?

만약을 생각할때 해방이 안되고 일본놈이 우리 강토를 영원히 노략질을 일삼았다면 "모윤숙은 그 간드러지고 요염한 붓끝으로 일본의 고관대작들한테는 인간이 느낄수 있는 최고의 아첨으로. 간드러지고 요염한 추파로. 그리고 또 요망스런 몸 놀림으로. 고관대작들의 밀고의 첩자로 변신하여 일본 정계를 피바다로 만들수 있는 수완과 수작이 뛰어난 여인으로 유추해석을 해보았다"
위에서 본 詩 몇구절을 보면 그렇게 하고도 남을만 하고. 철철 넘쳐나는 간지러움의 詩를 인용하면. '우리는 높이 펄럭이는 일장기 밑으로 모입시다'라 든가 '아들의 생명을 다 바치고 나서 우리 여성마져 나오라거든/ 생명을 폭탄으로 바꿔 전쟁마당에 쓸모있게 던집시다,'라 든가 '눈은 하늘을 쏘고 그 가슴은 탄환을 물리쳐/ 대동양의 큰 이상 두팔안에 꽉 품고 달리어 큰 숨 뿜는 정의의 용사 그대들은 이 땅의 광명입니다'라 든가 넓은 바다 한 가운데서 너를/ 부른다/ 사나운 파도넘어/ 네 원수를 물리쳐라/ 너는 아세아의 아들/ 대양의 용사란다' 라 든가 '어머니여! 거룩한 내 어머니여' 라 든가 한구절 한구절을 볼때는 자기나라 백성은 모른체 던져놓고 낮바닥은 일본년이 다 돼서 간지러운 것도 모르고 일본놈 턱 밑에서 쫑알쫑알 옹알거리면서 더러운 행위로 붓을 휘둘러댄 위 글에 말한대로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라고 나는 유추해서 생각해본다,

모윤숙은 해방이 되자마자 '내가 언제 친일을 했냐'면서 권력의 품으로 이리뛰고 저리뛰면서 여자로서 누릴수 있는 호화로운 영광을 다 누렸다, 모윤숙운 1961년 5월달에 이화여자대학교 문화공로상을 수상하고 1963년 7월 예술원상 문학부분 상을 .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1977년 5월에 이화여자대학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1979년 황룡사 9층석탑으로 3.1문화상을. 1990년 6월 7일 사망. 다음날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을 추서받았다, 친일 반역자 모윤숙은 내 뇌리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을것이다

1948년 제3차 UN 총회 한국 대표로 참가해서 외교관으로 활동했다는데, 사실 모윤숙이 제대로 활동한 것은 이승만 지지를 위한 로비 활동이었다.

당장 1948년 당시 남한 단독 정부를 반대하던 인도의 외교관 벵갈릴 크리슈난 크리슈나 메논과 교제하면서 이승만 지지 측으로 회유시켰다. 모윤숙은 이에 대해서 "만일 나와 메논 단장과의 우정 관계가 없었더라면 단독 선거는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 대통령 자리에 계셨다는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5]라고 했고, 메논은 이 심정 변화에 대해서 "외교관으로 있던 오랜 기간 동안 나의 이성(reason)이 심정(heart)에 의해 흔들린 것은, 내가 유엔 조선 임시 위원단 단장으로 있던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의 심정을 흔들었던 여성은 한국의 유명한 여류 시인 매리언 모(모윤숙)였다."라고 표현했다[6]. 이후 "건국의 아버지는 크리슈나 메논이고, 건국의 어머니는 모윤숙이다"라는 비웃음이 당시 세간에 퍼졌다.

그리고 6.25 전쟁이 지속 중이던 외국인 대상 사교 클럽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것이 1951년 이승만의 지시로 만들어진 낙랑 클럽이다. 모집 조건은 영어 능통한 이화여전 출신자였고, 총 100여 명 정도가 소속되었다. 이들은 이화여자전문학교 혹은 숙명여자전문학교 출신[9]으로 영어 능통자라는 조건 때문에 여기에 당시 고관들의 부인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본문에서 언급되는 전숙희의 책에서도 이야기가 나오고, 모윤숙 자체도 인정한 내용이다. 모윤숙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중심 인물이 손원일 제독의 부인 홍은혜, 화신 백화점 박흥식 사장 부인 허숙자 등이다. 총재는 김활란 회장은 모윤숙이었다. 역시 끼리끼리 노는구나. 이후 이 단체에 대해서 부인들의 민간 외교라는 주장도 존재하지만, 역시 낙랑 클럽에 소속되어 있었던 김수임을 변호하기 위해서 전숙희가 쓴 책,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에서도 이 단체는 유사 매춘 단체에 가깝게 묘사된다. 단적으로 지나친 로비 문제와 김수임 사건 관련으로 이 단체를 조사한 미군 CIC도 당시 조사 보고서에서 이 낙랑 클럽을 로비를 위한 고급 호스티스 단체로 규정해버렸다.


서울대 일제청산위, 1차 친일인물 12명 발표 경성제국대를 폐지하자
icon 1인시위 icon 2006-04-15 20:13:14 | icon 조회: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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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일제청산위, 1차 친일인물 12명 발표

서울대는 전신은 일본놈들이만든 경성제국대였읍니다,

우리는 앞으로 경성제국대를 폐지하고 백범대를 만들어야합니다,,

서울대학교 일제잔재청산위원회(준·이하 서울대 청산위)는 7일 기자회견을 열어 현제명과 장발 등 12명을 '서울대 1차 친일인물'로 발표했다.
이날 청산위가 발표한 친일 인물은 학술분야 1명, 문학 1명, 음악 2명, 미술 3명, 법조 3명, 정치 2명 등이다.

학술분야 이병도(전 서울문리대 교수), 문학분야 정인섭(전 서울대 대우 교수), 음악분야 현제명(초대 음대학장)과 김성태(전 음대학장), 미술분야 노수현(전 서울미대 교수), 장발(전 서울미대 학장), 장우성(전 미대교수) 등이 꼽혔다.

또 법조분야 백한성(경성 법학 전문학교졸), 한태연(전 서울법대 교수), 민복기(경성제국대 법학부졸), 정치분야 정운갑(경성제대 법문학부졸), 함동석(경성제대 법문학부졸) 등을 친일인물로 선정했다.

서울대 청산위는 ▲온라인(snuchungsan.cyword.com)과 오프라인을 통해 서울대 출신 친일인물 고발 접수 ▲일제잔재 청산서명운동 12∼14일 ▲친일청산강연회 13·14일 ▲친일 예술인 작품전 및 친일 인사 행적 거리전시회(4월 중순) ▲서울대 출신 친일인물 백서 발간 ▲학내 친일 조형물 및 기념관 등에 대한 명칭 변경 및 철거 등을 요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서울대 청산위는 이날 기자회견문에서 "광복 60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기까지 대학에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학문적 연구가 없었음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서울대에서 금기시 되어왔던 친일문제를 학우들에게 알려 미화되어 왔던 친일 인물들과 그 행적에 대해 공정한 평가를 묻고자 한다"며 친일인물 발표에 의미를 두었다.

김가람(서울대 독문과 4년) 동아리연합회장은 "친일인물에 대한 공적인 연구자료를 참고해 친일 인물을 선정했다"며 "4월 중순 이후 발표 예정인 2차에서는 1차보다 친일인물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서울대 청산위에는 미대학생회, 공대학생회, 동아리연합회, 사범대학생회, 농대학생회, 증산도학생회, 한국기독청년학생연합회, 밀알선교단, 수행불교회, 자연대학생회 등으로 구성됐다.

현제명과 장발 등 친일인물 12명은 누구?

다음은 서울대 청산위가 발표한 친일인물 12명에 대한 주요 약력과 친일행적, 서훈 및 수상 내역 등에 대한 소개이다.

▲이병도(1896∼1989) = 서울대 문리대교수, 문교부장관, 조선총독부 중추원 산하 '조선사편수회' 활동, 식민사관 총서 '조선사' 간행 참여. 국민훈장무궁화장, 인촌문화상. 5.16민족상.
▲정인섭(1905∼1983) = 서울대 대우교수, 펜클럽한국본부위원장, 조선총독부 산하 어용문학단체인 '조선문인협회' 발기 및 간사, 대동아전을 맞는 나의 결의 '국민문학'에 발표,
▲김성태(1910∼) = 서울대 음대학장, 대한민국예술원 원장, 친일 음악가들의 최대 어용 조직인 '조선음악협회' 작곡부 위원, 국민총력조선연맹과 조선음악협회 등 일제 어용기관과 단체가 주최하는 정치적 연주회 활동.
▲현제명(1902∼1960) = 서울대 초대 음대학장,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 음악보국을 목적으로 하는 '경성후생실내악단' 결성 및 이사장 역임, 징병실시 야외음악의 밤에서 '항공일본의 노래'와 '대일본의 노래' 불렀다, 현제명 동상.
▲노수현(1899∼1978) = 서울대 미대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아동 잡지인 '신시대'에 전시체제 국민요강을 선동하는 만화 그림, 중일전쟁 시기 황궁위문 부채그림을 그려 조선총독부에 납부, 조선미술상, 은관문화훈장 등 수상.
▲장발(1901∼2001) = 서울대 미대학장, '조선미술가협회' 평의원으로 활약, 이 단체는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에 배치돼 국방기금 마련 전람회 개최, 대한민국예술원상, 서울시문화상, 서울대 개교50주년 행사에서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으로 선정되고 학내에 동상이 세워짐, 장발의 호를 딴 우석홀 학내에 개관.
▲장우성(1912∼) = 서울대 미대교수, 한국미술가협회 부이사장,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운영위원, 친일미술단체인 '조선미술전람회' 에 참여하여 다수 입상, 총독부정보과와 국민총력조선연맹이 후원한 '반도총후미술전람회'에 일본화부 추천작가로 참여.
▲백한성(1899∼1972) = 경성법학 전문학교 졸업, 평양지방법원판사, 청진, 광주, 대전지방법원 판사, 대법관, 내무부장관, 사법관 시보시험에 합격하여 일제 지침에 순응한 법조인.
▲한태연(1916∼?) = 서울대 법대교수, 6대·9대·10대 국회의원, 유신헌법제정 관여,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한 일제 고문 출신 명망가라는 이유로 내무부장관 고문 등을 맡음.
민복기(1913∼) = 경성제국대학 법학부 졸업, 경성지방법원 판사, 대통령 비서관, 검찰총장, 법무부장관, 대법원장, 고등 문관시험에 합격하고 창씨개명, 국민훈장 무궁화장.
▲정운갑(1913∼?) =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졸업, 친일 엘리트관료의 등용문인 '고등문관시험' 합격, 내무차관, 5선 국회의원 역임, 신민당 전당대회 의장 및 총재대행.
▲한동석(1909∼1956) =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졸업, '고등문관시험' 합격, 자유당 총무부장, 함경남도 경찰부 고등경찰 책임자로 근무하면서 독립투쟁 탄압하고 성과를 인정받아 총독부로 영전, 일제 식량수탈에도 앞장.

2006-04-15 20: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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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문학인 42명 명단 발표

김동인 이광수 서정주 등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문제연구소, 계간 실천문학, 나라와 문화를 생각하는 국회의원 모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 등은 14일 친일문학인 42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이 단체들은 이날 오전 11시 국회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시, 소설ㆍ수필ㆍ희곡, 평론 등 각 분야별 친일문인 명단을 공개하고 선배 문인들의 과오를 사죄한다는 내용의 '문학인 선언'을 낭독했다.

이날 공개된 친일문인은

■ 친일문학인 42명 명단
시 : 김동환 김상용 김안서 김종한 김해강 노천명 모윤숙 서정주 이찬 임학수 주요한 최남선
소설·수필·희곡 : 김동인 김소운 박영호 박태원 송영 유진오 유치진 이광수 이무영 이서구 이석훈 장혁주 정비석 정인택 조용만 채만식 최정희 함대훈 함세덕
평론 : 곽종원 김기진 김문집 김용제 박영희 백철 이헌구 정인섭 조연현 최재서 홍효민
등이다.

그동안 이광수, 서정주, 유치진 등 일부 작가들의 친일문학 시비가 그치지 않았고, 이들의 작품이 여러 경로를 통해 산발적으로 소개된 적은 있으나 작품목록과 발표시기, 매체명 등을 구체적으로 일괄 공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중 이광수는 1939년 2월 「동양지광」에 발표한 시 '가끔씩 부른 노래'를 시작으로 '내선일체와 조선문학'(1940.4, 조선) '지원병 훈련소의 하루'(1940.11, 국민총력) '대동아 일주년을 맞는 나의 결의'(1942.12, 국민문학) '폐하의 성업에'(1943.2, 춘추) '모든 것을 바치리'(1945.1.18, 매일신보) 등 103편의 시, 소설, 논설등을 태평양전쟁 막바지까지 매체에 기고했다.

편수를 기준으로 보면 이광수에 이어 주요한(43) 최재서(26) 김용제(25) 김동환(23) 김종한(22) 이석훈(19) 박영희(18) 김기진(17) 노천명(14) 백철(14) 최정희(14) 정인택(13) 채만식(13) 모윤숙(12) 유치진(12) 서정주(11) 정인섭(11) 함대훈(11) 박영호(10) 등이 적극적이었다.

이번 친일문학 명단에는 월북했거나 사회주의 계열의 문학활동을 펼쳤던 박영희, 박태원, 이찬 등도 포함돼 있다.

선정작업에 참여한 문학평론가 임헌영씨는 "친일 여부의 판단기준은 식민주의와파시즘의 옹호 여부로 삼았으며, 일본어로 작품활동을 했거나 친일단체 참여, 창씨개명 등은 참고만 했다"고 밝혔다.

이같은 기준에 따라 일본어로 작품을 썼으나 항일의식을 드러낸 김사량, 일제의 폭악성을 고려해 한 두 편의 글을 남긴 정지용과 김정한은 친일작가 목록에서 뺐다.

이날 발표된 친일문인 명단과 작품목록은 이달 중순 발간될 계간 「실천문학」가을호에 게재되며 친일문인의 명단과 전력, 선정근거 등은 민족문제연구소 홈페이지 (www.historyfund.com) 를 통해서도 일반에 공개된다.

한편 이날 오후 2시부터는 같은 장소에서 '강요된 부역인가 내재된 신념인가'를 주제로 한 학술심포지엄이 열려 친일문학의 자발성과 일제하 문화예술계의 친일논리의 성격을 규명하는 토론을 벌였다.

(서울/연합뉴스)


친일파 708명 공개


△ 2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의원들이 708명의 일제하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명단발표에 앞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종근 기자root2@hani.co.kr

방응모·김성수씨등
의원모임·광복회"민족정통성 수호위해 밝혀"


일제강점기에 친일 활동을 벌인 주요인사 708명의 명단이 해방이후 57년만에 처음으로 발표됐다. 특히 이 명단에는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김성수 전 동아일보 사장 등 해방 이후 우리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인물이 다수 포함돼 있어 앞으로 이들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둘러싸고 적잖은 논란이 예상된다.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회장 김희선)은 2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그동안 광복회(회장 윤경빈)와 함께 심사해온 `일제하 친일반민족행위자' 692명의 명단과 그들의 구체적 친일행적을 공개했다. 이 모임은 또 광복회가 명단공개를 꺼린 16명에 대해서도 자체적으로 친일파로 규정하고 그 명단을 밝혔다.

이 16명에는 방응모·김성수 외에 여성박사 1호 김활란, 시인 모윤숙 등 여성계 6명, `봉선화' 작곡가인 홍난파, 서울음대 창설의 주역 현제명 등 문화·예술계 6명, 동국대 초대 총장 권상노, 한민당 외교부장 장덕수 등이 포함돼 있다.

이 모임의 심의위원장을 맡은 서상섭 한나라당 의원은 “이들 16인은 친일행적 외에 우리 사회에 그 나름대로 끼친 공적이 있는데다, 아직도 살아있는 영향력을 미치고 있어 공개 여부를 놓고 논란이 있었다”며 “그러나 일제시기에 분명한 친일행적이 있는 만큼 그 명단을 공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의원모임과 광복회가 의견을 같이 한 692명에는 을사오적인 이완용, 정미칠적인 고영희, 일진회의 김명준을 비롯해 서정주·주요한·이광수·최남선 등 유명 문인들도 포함돼 있다.

이 모임의 회장인 김희선 민주당 의원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죄상을 밝히는 일은 국민생활의 최고 도덕규범이며 민족의 정통성을 수호하는 일임과 동시에 세계일류국가로 가는 길에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며 “역사의 심판에는 공소시효가 없다는 믿음으로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명단을 발표한다”고 말했다.

이날 명단 발표에는 민주당의 김경천 김성호 김태홍 김희선 배기선 박상희 설송웅 설훈 송영길 신기남 심재권 원유철 이상수 이재정 이종걸 이창복 이호웅 임종석 전갑길 정장선 최용규 의원과, 한나라당의 이부영 김원웅 김홍신 서상섭 의원이 참여했다. 김의겸 기자kyumm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