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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칼럼 > 한홍구 칼럼 목록 > 칼럼내용   2004년09월16일 제5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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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님, 판사님, 길들여진 판사님…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1948년 대한민국 출발 때 3부 중 가장 깨끗하고 똑똑했던 사법부가 가장 처절하게 망가진 이유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최근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활약이 눈부시다. 두 기관이 서로 경쟁이나 하듯 수구적인 결정을 연달아 내놓아, 철없는 ‘좌경 정권’ 때문에 이 나라가 결딴날까봐 노심초사하는 ‘애국세력’에게 천군만마의 힘이 되어주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지난 8월26일 국가보안법의 말 많고 탈 많은 고무찬양죄에 대해 재판관 9명의 전원 일치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같은 날 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처벌하는 현행 병역법에 대해서도 7 대 2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이에 뒤질세라 대법원은 9월2일 국가보안법 폐지론을 겨냥해 “나라의 체제는 한번 무너지면 다시 회복할 수 없는 것이므로, 국가의 안보에는 한치의 허술함이나 안이한 판단을 허용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대한민국 주류 중의 주류!

대법관이나 헌법재판소 재판관이라는 자리에 오른 분들이 보수적이라는 점이야 익히 알려진 사실로 새삼 놀랄 일이 아니지만, 사람들은 세속의 정치적 일에 초연한 척 지내온 점잖은 분들이 작심을 하고 강경한 발언을 쏟아내는 이유가 궁금한 것이다. 왜 그럴까? 그 입장에 서서 보면 이해할 만도 하다. 1997년 선거에서 대통령 자리가 넘어갔다. 1960년 4월부터 1년여 동안의 짧은 에피소드를 빼고는 대한민국 수립 이래 처음으로 정치권력이 바뀌었다.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이른바 ‘주류’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납득할 수 있었다. “그래, 5년만 참자.”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뎌내면서 5년은 흘러갔다.


△ 1971년 7월 사법 파동 당시 유태흥 수석부장판사가 형사지법 판사들의 사표를 모아들고 있다. 사법부가 철저히 길들여지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2002년, 다시 대선의 계절은 왔다. 그런데 또 지고 말았다. 이번에는 책임져야 할 환란위기도, 이인제로 인한 적전분열도 없었고, 정몽준은 선거 전날 밤 노무현과 결별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질 수 없는 선거에서 진 것이다. 김대중은 비주류 내에서는 그래도 주류였지만, 바보 노무현은 비주류 내에서도 비주류였다. 기득권층인 ‘주류’로서는 이런 노무현에게 져서 앞으로 5년을 더 보내야 한다는 것도 참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런 추세가 계속되어 영원히 정권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벌어진 것이 탄핵이었다. 의회 다수의석의 힘을 빌려 잃어버린 대통령 자리를 되찾으려는 무모한 시도는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갖고 탄핵을 밀어붙인 거대야당이 거대여당의 출현을 막아달라고 호소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해서 ‘주류’는 행정부에 이어 입법부마저 ‘비주류’에게 넘겨주게 된 것이다. 국가의 3부 중 주류에게는 이제 사법부 하나가 남은 셈이다. 대통령이 넘어가고, 입법부도 넘어가고, 종이신문의 영향력은 방송과 인터넷 매체에 치여 위축됐고, 게다가 사법부 내의 사정도 옛날 같지 않다. 사법개혁이니 뭐니 해가며 지난 수십년간 굳어져온 법관 서열 대신에 대법관 인사청문회를 하질 않나, 시민단체가 후보를 추천하거나 검증하겠다고 하질 않나 여간 피곤한 게 아니다. 또 여태까지 아무 탈 없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1만명을 감옥에 보내왔는데 갑자기 하급심에서 무죄 판결이 떨어지지 않나, 해방 이후 최대의 거물 간첩이라며 국가보안법의 사활을 걸고 몰아붙인 송두율 교수가 핵심적인 부분에서 무죄를 받아 풀려나지를 않나, 주류권력의 마지막 보루가 된 사법부의 입장에서는 나라 전체가 정말 위기 상황에 빠진 꼴이다.

<한겨레21>에서도 얼마 전 특집으로 다루었지만, 이제 모든 것은 헌법으로 통하는 세상이 되었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과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아니 바라는 대로 인권의 최후 보루가 될 것인가, 아니면 흔들리는 ‘주류’ 기득권층이 그래도 끝까지 장악하고 있는 국가권력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 계속 시대 흐름에 역행하고, 젊은 법관들이 고뇌하며 내린 하급심의 전향적 판단을 모조리 퇴짜 놓는 그런 역할을 하게 될 것인가? 이 대목에서 우리는 사법부의 역사를 돌이켜보아야 한다. 1948년 대한민국이 출발할 때 그래도 3부 중에서 가장 깨끗했고 제 기능을 수행했던 사법부가 어쩌다 저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정치깡패가 판사를 협박하던 50년대

1950년대는 정치깡패의 시대였다. 1958년 7월2일 유병진 판사는 간첩 혐의로 구속 기소된 진보당 당수 조봉암에게 예상을 깨고 간첩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 그리고 사흘 뒤 법원은 단체손님을 받았다. “친공판사 유병진을 타도하라!”고 부르짖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애국청년’ 수백명이 법원에 난입한 것이다. 경찰은 이런 때면 늘 어디 가서 딴 짓 하다가 한 시간쯤 흐른 뒤에 나타나는 법이다. 유병진 판사는 이에 앞서 4월에는 서울대 문리대 학보에 ‘무산대중의 체제로의 지향’이라는 무시무시한 부제 아래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조국을 갈구한다’라는 치기 어린 글을 기고한 유근일- <조선일보>의 바로 그 유근일이다- 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리고 6월23일에는 용산중학 교감으로 재직 중에 간첩 혐의로 기소된 이태순 피고 사건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내렸다. 이때는 비록 김병로 대법원장은 퇴임한 직후였지만, 그가 일궈놓은 전통에 따라 많은 판사들이 법대로 판결하고 있었다. 5척 단구의 조그마한 보수주의자 김병로는 이승만 시대의 무지막지한 외풍으로부터 사법부를 지켜낸 든든한 거목이었다.

1960년대 전반에도 법원의 결정에 불만을 품은 권력의 주구들은 법원으로 몰려갔다. 한-일 굴욕외교 반대 데모가 한창이던 1964년 5월21일, 이번에는 정치깡패가 아니라 정복을 입은 군인들이었다. 법원이 박정희가 내건 ‘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을 벌인 시위 주동학생들의 구속영장을 대부분 기각하자 수경사 소속 군인들이 법원에 난입하고 심지어 판사의 집까지 찾아가 당장 구속영장을 발부하라며 행패를 부린 것이다.

자기를 천황쯤 되는 초월적 지위에 놓고 싶어했던 박정희는 3권분립을 원리로 삼는 민주주의을 경멸했고, 가끔 행정부를 견제하려 드는 사법부를 극도로 불신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가 1962년 5월14일 대법원장에게 보낸 ‘지시각서’ 5호의 내용을 잠깐 살펴보자. 박정희는 “혁명 이래 일부 법관이 아직도 새로운 세계관의 확립 없이 돈과 술에 팔리고 정실과 야합”하고 있으며, 중대한 국가적·사회적 법익을 침해한 불순분자는 방면하고 힘이 없어 땅을 치고 우는 약자에 대하여는 무고한 벌을 가하고도 하등의 양심적 가책도 없이 마치 법은 자기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질책했다. 완전히 사단장이 밖에서 술 먹다가 사고치고 들어온 초임 법무관 야단치는 어조였다. 박정희에게 모든 국가기구는 통치권자가 세운 목표를 향해 일로매진해야 하는 존재였지만, 사법부는 여기에 역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승만도 꿈꾸지 못한 사법기구에 대한 지배를 시도하게 된다. 불행하게도 박정희 시대에는 가인 김병로나 권승렬, 최대교같이 늘은 아니더라도 가끔씩 권력에 맞서 외풍을 막아줄 역할을 할 사람이 없었다.


△ 박정희 정권 시절 검찰총장에 임명돼 벼락출세한 신직수(왼쪽). 그와 환상의 콤비를 이뤘던 법무장관 민복기(오른쪽).

1963년 12월7일 박정희는 중앙정보부 차장 신직수를 검찰총장에 임명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서른여섯. 그의 학교나 고시 동기들은 대개 평검사였고 15년에서 20년 정도 세월이 흐른 뒤에야 검찰총장이 되었으니 벼락출세도 그런 벼락출세가 없었다. 오죽하면 심기가 불편한 고검장들이 집단으로 검찰총장의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았을까? 신직수가 벼락출세를 한 비결은 박정희가 5사단장 시절, 그가 사단 법무참모를 지낸 인연 때문이다. 육사 출신이 주도한 군사정권과 판검사들의 야합을 육법당(陸法黨)이라 불렀는데, 아마 신직수가 법당의 초대 당수쯤 되지 않았을까? 얼마 전 검찰개혁 문제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을 때, 검찰이 연공서열에 따른 인사를 하는 것이 봉건적이라는 비판이 쇄도했다. 나 역시 이 비판에 기본적으로 동의하지만, 저 험한 군사독재 시절에 연공서열에 따른 인사에 나름대로 상황에 따른 합리성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자격 없는 권력자가 자격 없는 대상자를 검찰총장이나 다른 요직에 인재 발탁이란 미명하에 끌어올리는 것을 막으려면, 조직 전체가 똘똘 뭉쳐 “서열대로 합시다”라고 할 수밖에. 가끔 장관이나 고위직 인사를 보면 ‘왜 저런 사람을 저런 자리에 앉히나’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뜻밖에 큰 감투를 쓰게 된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야 권력자 원하는 대로 진흙탕에서 뒹구는 일도 마다 않고 하는 것이지, 자기가 잘나서 그 자리에 올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뭐 빚진 게 있다고 무리수를 두겠는가? 이런 게 박정희의 용인술이었다.

신직수는 무려 7년 반을 검찰총장 자리를 차지하여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장수 총장이 되었는데, 그의 총장 시절 검찰은 완전히 독재권력의 충실한 시녀가 되었다. 그 계기가 된 것이 바로 1964년 8월의 제1차 인혁당 사건이다. 한일회담 반대시위인 6·3 사태로 인해 계엄령이 선포된 지 얼마 뒤 중앙정보부는 북의 지령을 받아 국가를 변란하려는 지하조직인 인민혁명당을 적발했다고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김형욱의 중앙정보부는 이 사건의 각본을 다 짜서 서울지검으로 송치했는데, 서울지검 공안부 부장 이하 검사들이 아무런 증거도 혐의도 찾을 수 없다며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다고 나선 것이다. 이에 법무장관 민복기는 “상명하복의 검찰기강을 세우기 위해 공소장에 서명을 거부한 검사에 대해서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공안부장 이용훈 등 3명의 검사가 사표를 제출했다. ([한겨레] 살아있던 검찰)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몹시 분개했고, 중정 차장으로서 그를 모셨던 신직수가 총장으로 있던 검찰은 이용훈의 사표를 수리했다. 이 사건을 거치면서 검찰은 1970년대를 풍미한 참고서의 이름마냥 박정희 체제에 ‘완전정복’되었다. 신직수는 이후 중앙정보부장이 되어 사법살인으로 악명을 떨친 2차 인혁당 사건을 처리했다.

‘양심에 따른 기소거부’를 아십니까

조직을 장악할 때는 당근도 같이 주는 법. 법무장관 민복기, 검찰총장 신직수, 이 환상의 콤비는 대법원이 전체 법조계를 대표하기 위해서 대법원 판사에 검찰 출신도 들어가야 한다는 궤변을 내세워 마침내 대검차장 출신의 주운화 등이 검찰 대표로 대법원 판사가 되는 길을 연다(이런 이상한 관행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주운화는 동백림 간첩단 사건을 맡아서 역시 법대로 일부 피고의 간첩 혐의의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가 홍역을 치렀다. 유병진 판사 때나 1964년 군인들의 법원 난입 사건 때처럼 직접 법원에 ‘애국청년’들이 몰려온 것은 아니고, 벽보를 붙이는 수준이었지만, 거기 사용된 표현은 과거의 두 사건보다 훨씬 거칠었다. 담당 재판장 김치걸이나 주심 주운화 등은 ‘김일성의 앞잡이’로 ‘법관의 가면을 쓰고 도사린 붉은 늑대’이며 사법부는 ‘북괴의 복마전’으로 규탄됐다. 이 사건을 만들어낸 정보기관의 간부는 인책 사임했다는데, 사법부 보호를 위해서 공작 자체에 책임을 물어서가 아니라 방법이 너무 졸렬해서 역효과 났다는 이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박정희 하에서 사법부가 철저히 길들여진 계기는 역시 1971년 7월 말에 시작된 사법 파동이었다. 박정희는 1971년 4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에 신승하고 7월에 3선 임기를 시작했다. 바로 이 무렵 대법원은 사상 처음으로 위헌심판권을 행사하여 군인과 군속의 손해배상권을 제한하는 국가배상법을 위헌이라 판결했다. 그리고 학생시위로 구속되거나 반정부 논문을 기고했다가 반공법으로 기소된 문인들이 잇달아 무죄선고를 받고 풀려났다. 이에 박정희는 격노했다. 새로이 법무장관으로 승진한 신직수에게 사법부 길들이는 과업이 부여됐다.

판사들이 집단사표를 낼 정도였으니…

1971년 7월28일 서울지검 공안부(이때 공안부장은 1964년 인혁당 사건 때 공안부 검사로는 유일하게 사표를 쓰지 않은 최대현이었다)는 무죄 판결을 많이 낸 재판부의 하나인 서울형사지법 항소3부 이범렬 부장판사와 배석 최공웅 판사 등의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혐의 사실은 재판부에 할당된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의 증인심문을 위해 제주도에 갔을 때, 피고인의 변호사로부터 향응을 제공받았다는 것이다. 물론 피고인 변호사로부터 향응을 제공받은 것은 잘못이지만, 공식 출장비가 거의 책정되지 않는 현실에서 이는 오랜 관행으로 굳어져 있었다. 형사지법 유태흥 수석부장판사가 증거인멸과 도주우려가 없다고 영장을 기각하자 검찰은 증거를 보강하여 다시 영장을 청구했다. 보강된 증거란 두 판사가 출장가서 ‘객고’(客苦)를 푼 것에 관한, 좀 쑥스러운 내용이었다.

이 사건은 누가 보기에도 명백하게 법관 길들이기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보수적이고 집단 행동을 안 하기로 소문난 판사들도 집단 사표를 내는 등 강하게 반발했다. 판사들은 이번 집단 사표가 단순히 동료를 두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법권 독립’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면서, 1) 반공법, 국가보안법 사건에서 검찰과 견해를 달리한 법관을 용공분자로 취급하여 협박하고 신원조사를 했다, 2) 판사실에 도청장치를 했다, 3) 무죄선고가 나면 법관이 부정한 재판을 한 듯 비난하면서 예금통장을 조사했다, 4) 판사들을 미행, 사찰하고 함정수사까지 했다 등등 그동안의 사법권 침해 사례 7개항을 공개했다.

일선판사들의 집단 행동이 이어지자, 대법원 판사들은 회의를 열고 대법원장(인혁당 사건 당시 법무장관인 민복기가 대법원장이 되어 있었다)이 대통령을 만나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결의했다. 그러나 대법원장의 대통령 ‘알현’은 끝내 실현되지 않았다. 박정희는 결국 영장을 청구한 공안부 라인을 문책성 전보인사를 하는 것으로 법관쪽에 약간의 퇴로를 제공했고, 법관들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사건 한달 만에 스스로 사표를 철회했다.

사법 파동이 일어난 1971년 여름은 유난히 큰 사건이 많았다. 파동이 한창 진행 중에 광주대단지 폭동, 남북이산가족찾기와 남북 적십자 회담 발표, 실미도 사건 등이 일어났고, 뒤이어 교련반대 데모로 위수령이 발동되고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됐다. 사법 파동은 박정희의 영구 집권 음모인 10월유신을 앞두고 걸림돌이 되는 각 집단을 각개격파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유신헌법이라는 황당한 헌법 아래 법관 재임용제도가 도입되어 대통령은 법관의 임명권마저 손에 넣었다. 그리고 1973년 3월 법관 재임용에서는 전체 법관의 10%가 넘는 48명의 법관이 법복을 벗어야 했다. 1971년 국가배상법 위헌 판결에서 위헌 의견을 낸 대법원 판사 9명을 포함해, 학생들을 무죄 방면하거나 구속영장을 기각한 판사들도 대개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 10·26 사건 당시 김재규에게 신군부가 원한 내란목적살인죄 대신 단순살인이라는 소수의견을 제시한 대법원 판사 6명은 모두 전두환 정권 출범과 함께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살아남은 판사들은 길들여져갔다. 이제 사법부(司法府)는 행정부의 한 부서인 사법부(司法部)라 불리더니 급기야는 사법부(死法部)라 조롱받게 되었다. 10·26 사건 김재규에게 신군부가 원한 내란목적살인죄 대신 단순살인이라는 소수 의견을 제시한 대법원 판사 6명은 모두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면서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전두환 정권 출범 직후 대법원장에서 물러난 이영섭은 신군부의 외압에 마음고생을 하다 입이 돌아갈 정도였다. 그가 퇴임사에서 한 말, 자신의 대법원장 시절은 오욕과 회한의 역사였다는 말은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됐다. 형사지법 수석부장 시절 검찰의 영장청구를 기각하고, 사표를 쓴 판사들을 대표해서 성명서를 읽던 유태흥은 대법원 판사가 된 뒤에는 김재규 사형 판결에서 적극적 역할을 했고, 결국은 대법원장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유태흥은 법관 인사의 난맥상을 비판하는 글을 한 법조신문에 기고한 판사를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 부임 하루 만에 울산지원으로 전보시켰다가 2차 사법 파동을 초래하고, 대법원장에 대한 사법 사상 최초의 탄핵 발의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렇게 처절하게 망가져간 사법부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올라가는 대법원에서 그나마 소수 의견을 가장 많이 낸 판사가 이회창이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회창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이유

지난번 탄핵 사태 때 사람들은 혹시라도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을 인용하면 어쩌냐는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러나 3월13일 광화문의 촛불시위를 다녀온 뒤 나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았다. 느긋해하는 나를 보고 친구들은 “뭘 믿고 그러냐”며 설마 헌재 재판관들의 양심을 믿느냐고 힐난했다. 나는 내가 그렇게까지 순진하지는 않다면서 ‘그들의 양심은 나도 안 믿지만 거기까지 올라온 그들의 눈치만큼은 믿어줘도 된다’며 촛불이 꺼지지 않으면 문제없다고 답해 같이 웃었다. 그런데 이제 헌재는 그 눈치를 벗어버리고- 어떤 재판관은 인사청문회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해줘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서 나를 놀라게 했는데, 정작 헌재 결정에서는 가장 강력하게 반대했다- 용감하게 수구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그리고 어떤 법원장은 자못 비장하게 시민단체의 개입으로 사법부의 독립이 훼손되고 있다는 퇴임사를 남겼다. 설마 군사독재 시절을 나름대로 고통스럽게 살아낸 저분들이 말하는 사법부의 독립이 국민으로부터의 독립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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