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은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에 대한 명예훼손 기소를 즉각 철회하고, 법원은 법의 정의를 구현하는 기구로 재탄생하라!!!

☞ 대법원의 법률해석 불법 변경에 대한, 공개 질의서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는, 오전 9시면 어김없이 대법원 앞에서 자신의 부당한 재임용 탈락 등에 항거하는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김명호 교수는 성균관대 입시부정사건을 폭로하고 그 시정을 촉구했다는 이유로 재임용을 거부당한 후 10년 넘게 싸우고 있다. 그의 저항 방식은 정당한 의사표현 방법인 1인 시위와 언론을 통한 문제제기이다.

그런데 지난 2월 24일 대법원 경비대장은 김명호 교수를 관련 '판사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검찰에 고발하였고, 급기야 5월 30일 서울중앙지검 신성식 검사는 허위사실 적시를 통한 판사들의 명예훼손 혐의로 그를 불구속 기소하였다.

형법 제307조 제2항 소정의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는 명예를 훼손하려는 사람이 상대방의 사회적 가치를 훼손하려는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적시하려는 내용이 허위임을 알면서도 그 내용을 공공연히 유포해야만 성립한다.
그러나, 김명호 교수의 피켓 구호와 인터넷 글 등은 , 성대 입시부정 사건과 자신의 부당한 재임용 탈락과 관련된 판사들의 직무유기 및 은폐방조 행위에 대한 것으로, 상대방의 명예를 실추시킬 목적으로 고의적으로 허위사실을 유포한 것이 아니라, 재판과정을 통해 자신이 명백히 진실이라고 확인한 사실들을 공중에게 알린 것이며, 그 사실을 은폐하기보다는 폭로하는 것이 공공의 이익에 더 부합한다고 판단되는 사실들을 유포한 것에 불과하다.

게다가 그는 지난 4월 17일 그가 보기에 분명히 잘못을 저질은 판사들을 구체적 증거들을 제시하면서 직권남용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으며, 5월 30일의 불기소 처분에 대해서도 6월 7일 재정신청을 제출한 바 있다.
따라서 검찰의 김명호 교수 기소는 전혀 합당한 근거를 지니지 못한 것으로 민주적 의사표현 방식인 1인 시위와 공론 형성을 위한 글쓰기 등을 저지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는 의혹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법의 악용’ 보다 법의 권위를 더 실추시키는 일은 없다는 점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게다가 명예훼손의 당사자가 아닌 제3자가 그를 고발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런 행위가 일반화된다면, 헌법적 권리인 언론-표현의 자유가 심대한 제약을 받을 것이라는 점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런데 법원은 그간 재임용탈락 문제에 대한 최초의 판례로서, 재임용제 취지를 충실히 반영한 1977년 9월의 대법원 판례 77다300을 고의적으로 은폐-방치해 오면서, ‘재임용 여부는 전적으로 임용권자의 재량이다’라는 저 악명 높은 1987년 6월 9일의 판례 86다카2622에 근거한 판결을 거듭해 옴으로써, 지난 20년간 400여명에 달하는 해직교수들을 양산하는 엄청난 잘못을 저질러 왔다.

게다가 우리가 보기에, 구 사립학교법 제53조의 2 제3항이 헌법에 합치하지 않는다는 2003년 2월의 헌법재판소 결정에 힘입어 2005년 1월 27일 사립학교법이 개정 공포된 이후에 있었던, 사립대 교수 재임용탈락 사건에 대한 최초의 판결인 지난 3월 9일의 대법원 판결(주심: 양승태 대법관, 2003다52647, 2003재다262)도 ‘교원지위 법정주의’를 규정한 헌법 제31조 제6항을 위반하고, 구제절차를 구비한 현행 사립학교법 등을 사실상 무용화-무효화시키는 위헌적-위법적 판결이었다.

이런 판결들만큼 법원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판사들이 실추한 자신의 명예를 진정으로 회복하길 원한다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피눈물을 흘리도록 강제하고 불명예를 안겨준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는 일에 과감하게 나서야 한다.
검찰 역시 자신을 정화하는 동시에 법원개혁이 이뤄질 수 있도록 힘을 보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판사들의 잘못을 지적했다고 해서 지적한 사람을 명예훼손으로 기소하는 것과 같은, 아무리 쓰디쓴 비판이라 할지라도 국민들의 비판을 항상 겸허하게 수용해야 할 공적 기구의 처신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참으로 졸렬하기 그지없는 짓거리를 당장 집어치워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검찰은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에 대한 명예훼손 기소를 즉각 철회하라!
검찰은 법을 악용해 언론-표현의 자유에 재갈을 물리는 일체의 행위를 즉각 중지하라!
법원은 숱한 과오를 저질러 온 자신의 과거를 청산하고, 법의 정의를 구현하는 기구로 거듭나라!


2006년 6월 26일

민주주의 법학연구회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전국교수노동조합
천주교인권위원회
학술단체협의회
한국비정규직교수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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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기획]김우종의 대학비사(大學 秘史) ▶ 저 분노의 땅에 상아탑을세워라(1)

    이일형 news@unn.net 승인 2000.02.25 12:05

    - 대학 교육 50년의 성찰(省察)과 새로운 천년을 희원(希願)하며 … (1)프롤로그 : 해방 전야 분단의 38선, 오욕과 갈등의 시간. 일제를 거쳐 해방과 분단, 군사 독재 등 갖은 오욕으로 점철된 지난 +1백여년의 한국 현대사 가운데 근대적 의미의 교육, 특히 역사의 중심에 섰던 대학의 모습을 돌아보는 작업은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를 맞는후학들에게도 결코 소홀히 취급될 수 없는 일이다.

    대학의 역사는 대학인들만의 것이 아니며 시대에 따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영향을 미치며 성장해왔기 때문이다.

    본지는 새로운 천년을 시작하는 2000년을 맞아 대학 과거사를 정리하는 특별기획 김우종의 대학 비사, '저 분노의 땅에 상아탑을 세워라'를 연재 보도한다.

    본 기획은 일제를 거쳐 해방과 함께 찾아온 분단 조국의 현실을 역사 +인식의 기초로, 획일화된 군사정권과 5·6공화국, 문민과 국민의 정부로 대변되는 최근에 이르기까지 시대별로 각기 모습을 달리해온 대학 교육 +상황과 현실, 사건의 기록들을 재조명하는 한편 사건 이면에서 신음하던 +수많은 지식인의 고뇌와 갈등을 되새기는데 초점을 두고자 한다.

    특히 평생 교육계에 몸담아 온 김우종 주필의 체험담을 바탕으로 그간 대학 주변에서만 맴돌던 각종 의혹과 소문의 근원을 찾아 숨겨진 비화들을하나 하나 발굴함으로써 근 현대 대학사 연구의 밑거름이 되고자 한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제보를 기대한다. <편집자>

    "학생 제군들. 저 미국을 보시오. 개척 시대의 미국을 잘 알지요? 개척 +시대에 그들은 어떻게 해서 오늘의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는지 …"

    1960년대 후반의 어느 화창한 봄날.

    서울의 한 신흥 대학 총장은 조회 시간에 나와 전체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개척시대의 미국 이야기를 서두로 훈화를 시작했다.

    그 무렵 이 대학에서는 한 달에 한번쯤 학생들과 교직원 전체가 본관 앞에 모여 조회를 열곤 했다. 요즘 같으면 유명가수라도 불러 미리부터 요란을 떨면 모를까, 출석 채크도 하지 않는 조회에 나와 총장님의 훈화 같은 것을 들어 줄 만큼 순박한 학생은 없는 세상이 됐지만, 당시만 해도 우선 ROTC 학생들부터 불러모아 가로 세로 꼿꼿하게 정렬시켜 기본 '청중' 자리를 메우고, 나머지를 교직원과 학생들로 채웠다. 특히 그 날은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는 첫 조회시간이었으므로 신입생들은 거의 전원이 참석해야 했다.

    이날 이 대학 총장은 왜 미국의 개척시대 얘기를 했을까 ?

    미국의 개척시대라면 영화에서나 보이듯 미화된 환상과는 달리 인디언을 거의 멸종시키고 극소수만을 보호3구역으로 몰아 넣고 살려 둔 잔혹한 대학살을 연상케 된다. 생태계 보존 차원에서 멸종 위기에 처한 포유동물 몇마리를 살려둔 셈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흑인 노예 몇백만명을 쇠사슬에 묶어 아프리카에서 잡아다 채찍질로 다스리며 넓은 땅을 개척해 +나갔다. 같은 백인종계라도 인간 백정 총잡이가 곧 법이었던 시대였음은 역사의 이면을 차분히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왜 하필 고등교육을 받는 학생들에게 그런 미국의 개척시대를 +상기시키려 했을까? 아마도 이 대학은 해방직후에 세워진 일부 대학들이 +종합대학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빚어졌던 비정상적인 일들에 대한 비난 +여론을 개척시대 미국의 상황에 대입시키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미국이 그렇듯이 우리나라 대학의 떳떳하지 못한 과거사도 빛나는 미래를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었다고. 물론 미국의 무수한 반인륜적 행위와 우리 대학 발전사 이면에 가려져 있던 그것은 아무리 공통점이 있어도 무법 수준은 별개의 것이지만.

    그런데 문제는 법이 무시된 대학 발전의 역사가 비단 이 대학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대다수 대학의 역사이며, 특히 고등교육 전반에 걸쳐 나타났다는데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과거를 비난하기 전에 왜 이 나라 고등교육이 처음부터 그런 모습으로 성장했어야 했는지, 그 근원부터 따져 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다소 진부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우리나라에 해방이 +어떻게 찾아왔으며 해방 조국에 대학이 세워질 때 그것을 누가 허가하고 감독하고 명령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본다면 원죄가 어디에 있었는지 짐작하는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10일 심야.

    미국 워싱턴 팬타곤의 국방차관 회의실에는 국무성, 육군성, 해군성의 최고 간부들이 갑자기 소집된 합동위원회(SWNCC)의 철야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날 밤 간부들간에 오간 회의의 주요 내용을 몇가지 사료를 토대로 옮겨보면 이렇다.

    "어제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왔습니다. 그런데 8일에 대일 선전포고를 한 소련은 한반도의 북단 상리(上里)를 기습하고 나진을 거쳐 빠른 속도로 남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세라면 한반도 전체를 곧 소련군이 점령하게 됩니다. 이를 저지하려면 우리도 당장 한반도에 상륙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군은아직 오끼나와에 머물러 있어 불가능합니다."

    이날 심야회의는 자정을 넘겨 11일까지 계속됐으며 논의 끝에 나온 최종안이 소련과의 협상안이었다. 서로 바쁘게 쳐들어갈 것 없이 한반도를 미리 둘로 분할해서 점령하기로 약속하자는 안이었다.

    "당신들 두 사람은 한반도를 둘로 나누시오. 30분 안에 하시오. 시간이 없소"

    이날 회의 도중 명령을 받은 두 사람은 육군성의 딘 러스크(Dean Rusk) 대령과 찰스 본스틸(Charles H. Bonestell) 대령이었다. 그들은 곧 +옆방으로 달려가 한반도 지도를 찾았다. 그런데 그 근처에는 한반도 지도가 없었다. 거침없이 빠른 속도로 남진하는 소련을 저지하려면 한시간이라도 빨리 협상안을 내놓아야 하는데 ….

    "이게 뭐야. '내셔널 지오그래픽'이군.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지"

    다급해진 두 사람은 황색 표지에 세계의 신비한 자연 환경과 풍속 등이 소개되고 있는 여러권의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허겁지겁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떤 한반도 지도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들은 곧 그 지도 위쪽에 위치한 38。선에 직선을 그었다. 구불구불 그었어도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그들은 분할선이 누구 집 안방을 자르고 지나든 말든 그리 신경 쓸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지도를 찾으며 우왕좌왕 시간을 다 보내 정작 38선을 긋는데는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어쨌든 한반도 가운데보다 북쪽으로 올려 그은 것은분명했다. 이미 한반도를 다 집어삼킨 소련이 38선 분할점령안을 받아들이기에는 무리한 요구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딘 러스크는 훗날 미 국무장관에 올랐다가 퇴임 후 회고록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

    "38선은 실질적인 합의에 도달할 수 있기에는 너무 북쪽에 위치해 있다. 소련이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뜻밖에도 소련의 스탈린은 38선 분할점령안에 한마디로 동의했다. +그래서 그는 소련이 군말 없이 찬성해 주었기 때문에 '약간은 놀랐다'는 것이다.

    이 말은 소련이 반대할 걸 예상해 적당히 비싼 값을 불렀다가 나중에 +양보해 타협할 생각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양보하려 했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소련이 더 남쪽을 요구했다면 독일의 +베를린을 쪼개듯 서울도 남대문에서 서대문으로 지나도록 선을 긋고 담벼락을 쌓게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는 총독부의 정무총감 엔도(遠藤 柳作)가 8월 15일 아침까지도 한반도 분할 사실만 알았을 뿐 그것이 38선이라는 것은 몰랐다는 고백에서도 나타난다. 그래서 여운형에게 한강이 분할선이 될 것이라며 항복에 따르는 정치적 흥정을 했다는 것이다.

    직선은 안방까지 둘로 쪼개고 지나가는데 비해 한강은 한반도의 중간이며 강물이 자연적인 분할선이자 방어선이 되는 것이니까 ….

    이처럼 해방 전야 이해관계에 있던 이들은 우리민족의 운명과는 상관없이 한반도 땅을 둘로 나눠먹을 수 있는 빵이나 떡쯤으로 여겼던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 대학의 기원과 해방 이전의 고등교육기관

    근대 개념의 대학 역사는 중세 유럽에서 태동했다. '대학(university)'이란 이름이 사용된 것은 15세기경이지만 12세기 중세 유럽에서는 근대적 의미의 대학이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돼 의학의 살레르노, 법학의 볼로냐, 신학의 파리 대학이 생겨났으며, 교황이나 황제등 위로부터 형성된 대학으로는 나폴리, 툴루즈, 프라하 대학 등이 등장했다.

    이 당시 대학 구성원들의 모임체를 통칭하던 우니베르시타트(universitas)와 고등교육의 시설 또는 장소적 의미로 사용되던 스투디움(studium)이 합쳐져 15세기에는 현재 사용되는 대학(university)이란 용어가 단일 개념으로 통용되었다

    시대에 따라 교육 내용에 다소 차이는 있지만 우리도 일찍이 고구려 태학, 신라 화랑도, 통일신라의 국학에 이어 고려시대 국자감에 이르기까지 이미 중세 이전부터 국가 또는 민간 차원에서 인재를 양성하는 +고등교육기관이 존재해왔다.

    1398년 조선 태조에 의해 설립된 [성균관]은 중세 유럽의 대학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명실상부한 엘리트 고등교육기관으로 조선시대 새로운 통치 세력으로 정치사와 사상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성균관대는 전신인 [성균관]의 전통을 이어받아 1백여년 안팎의 역사를 갖고 있는 다른 대학과는 달리 지난 1998년 건학 6백주년 기념식을 대대적으로 열기도 했다.

    근대 개념의 본격적인 대학은 1883년 8월 독일인 뮐랜도르프와 영국인 +핼리팩스가 설립한 [통변학교]가 영어학교로 문을 열었으며, 1885년에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현 연세대 의대의 기원이 된 광해원과 배재학당이알렌 부부와 아팬젤라에 의해 각각 세워졌다. 1886년에는 여자대학 최초의 이화학당이 설립됐으며, 1897년에는 평양에 숭실학교가 세워졌다.

    이를 계기로 신학교 설립이 잇따라 1901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신학교(장신대)와 평양신학교(총신대)가 설립됐으며, 1905년에는 일반신학당(김신대)이 개설돼 신학교육의 터전으로 +자리잡았다. 같은해 고려대 전신인 [보성학교]가 이용익에 의해 설립됐으며 1906년에는 숙명여대 전신인 [명신여학교]가, 1908년에는 동덕여대 전신인 [동원여자의숙]이 건립됐다.

    일제 강점기로 접어든 1910년부터 우리나라 교육제도는 복선형의 일본 학제를 따르게 되었고 1911년 9월에는 [조선교육령]이 공포되었다. 이 시기에 서울신학대학의 전신인 [성서학원]이 설립됐으며, 숭실학교는 1912년 3월 [숭실대학]으로 설립인가를 받아 [대학]이란 명칭을 사용하는 +최초의 학교가 되었다. 【취재 및 자료 지원 = 이일형 차장】

    알림 : 김우종의 대학비사에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를 받습니다. 해방 이후 지난 50여년간 대학교육 전반에 걸친 비사를 다룰 이번 기획에 자세한 애독 소감이나 제보, 증언을 주실 분은 본지 인터넷 전자신문(www.unn.net) [대학비사 코너] 또는 본사(TEL:2278-1105, FAX : 2263-2589, E-mail : leeih@unn.net)로 연락 바라며 채택된 분께는 소정의 고료도 지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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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일형


    김우종의 대학비사 (2) 해방의 감격, 그러나 잘못 낀 첫 단추.

    이일형 news@unn.net 승인 2000.03.03 12:05

    우리는 정말 해방되었던가? 해마다 한여름 8월 15일만 되면 광복절 행사를 열고 있지만 과연 우리는 진정 해방되어 민족의 광명을 되찾았던가?

    1945년 9월 8일.

    미 육군사령부 맥아더의 대리인 재조선 미군사령관 중장 하지(Jone R. +Hodge)가 이끄는 미군이 인천항에 상륙한 다음날 아침, 국민들은 서울에 입성하는 미군들을 연도에서 열렬히 환영했다. 한국인들은 이날 태극기와 함께 미국의 성조기도 들고 나갔다. 태극기도 +그리는데 까다로왔지만 성조기야말로 무슨 놈의 별이 그렇게나 많고 흰줄은 몇 개나 그려야 하는지‥.이런 걸 한국인들은 밤새 그려 길거리로 들고 나가 새벽부터 기다리다가 만세를 불렀다. 우리나라를 해방시켜준 고마운 우방에 감사를 표시하면서.그러나 이날 건국준비위원회의 여운형 등은 국민을 대표해서 하지 사령관을 만나려 했지만 상대도 해주지 않는 통에 망신만 당하고 돌아왔다. 반면 미군은 일본 총독부 관료들을 만나서는 그들에게 계속 남아줄 것을 부탁했다. 자기들이 그만 두라고 하지 않는 한 아무도 그들을 내쫓지 못한다는 보장까지 해주면서. 이처럼 미군을 해방군으로 생각하고 환영하던 우리 민족의 정서와는 달리 그들의 상황 인식은 사뭇 우리와는 거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군 +사령관 하지가 당시 부하 장교들에게 한 말은 그의 관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한국은 미국의 적이었다. 따라서 항복조건(surrender)과 절차에만 따라야 할 것이다"

    하지의 이 같은 태도는 그 후 전남 광주에 부임했던 한 중대장교가 한국인으로 임명된 민간 지도자들의 질문에 대하여 내뱉은 대답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한국은 적국과 같이 우리에게 무력으로 점령당했다. 물론 우리는 당신네 국민들을 죽이러 왔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험악한 말이 튀어나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상황을 잘못 알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점령의 개념을 확실하게 전해주고 +싶었던 게 아니었나 싶다. 미군이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 한국에 +왔다는 사실은 이제는 많이 알려진 사실이 되었지만. 국내·외에서 민족의 광복을 위해 죽음까지 바쳐 온 수많은 애국자들이 있었지만 해방이든 분단이든 당시 우리나라의 운명적 결정은 모두 일본과 미국, 소련 등 강대국의 패권 싸움과 정략에 따라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 ○ ○ ○

    1945년 8월 15일은 여름방학이어서 학교가 모두 쉬고 있었다.

    나는 이때 고향에서 라디오 앞에 앉아 일본왕 히로히토의 항복문 낭독을 들었다. 결사 항전패들의 방해 탓인지 잡음이 너무 심해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호꼬오 오사메루(창을 거두다)"라는 말로 보아 분명히 항복한다는 뜻이었다. 이 무렵 소련군이 청진까지 진격해 있었다는 소문은 우리 마을까지 들렸지만 일본 왕의 항복문 낭독으로 소련의 점령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그들은 미군이 한반도에 오기 전에 먼저 제주도까지 내려가 낫과 망치의 붉은 깃발을 꽂아 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소련군은 8월 24일 평양에 입성했다. 그리고 38선을 넘어 내 고향 황해도 연안읍내까지 따발총을 들고 나타났다. 38선을 넘지 않기로 한 약속도 어긴 것이다.

    당시 미국이 8월 10일 밤 긴급회의를 소집해 한반도 분할 점령안을 내놓지 않았으면 아마도 한국 땅은 제주도까지 집집마다 스탈린이나 김일성의 +초상화를 걸어두는 신세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이에 앞서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히로시마는 원폭 한방으로 도시 전체가 거의 초토화되었다. 일본은 이제 버섯구름으로 피어오르는 이 신형 폭탄 한방으로 전의를 상실했다. 그런데 미국은 이틀후인 10일 또 한방의 원폭을 나가사키에 투하함으로써 사실상 2차 대전을 마감하는 결정타를 날렸다. 결국 일본 왕이 소위 대본영 벙커에서 기어 나와 백기를 흔들었다. 세 번째로 도쿄에 원폭이 떨어지면 자기는물론 일본인 대부분이 피해를 입을 판이었기 때문이다.이렇게 일본 본토가 초토화되고 있을 때 소련군은 한반도 끝머리에 미리 깃발을 꽂은 권리로 남하하면서 한반도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반도 지도를 놓고 단 몇 분 사이에 허겁지겁 38선을 긋고 한국을 +나눠먹자고 한 미국의 발상이 우리에겐 큰 재앙이었지만 그들에게는당연시되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배경이다. 이처럼 우리 땅은 수렵의 사냥꾼에 의해 노획되고 그들이 나눠 가진 전리품에 불과했으며, 장차 민족 최대의 비극이라 할 6·25 전쟁의 고통을 안고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채 반세기를 따로 사는 불행한 민족이 되었다.

    그리고 그 분노의 땅 한쪽에 상아탑을 세우고 꿈을 부풀리며 몸부림쳐 왔던 것이다.

    ○ ○ ○ ○

    해방의 기쁨도 잠시, 조국은 분단되고 남한은 3년간에 걸친 미군정 치하에 들어갔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든 그렇지 않든 미군정기의 3년은 한국 현대 교육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며 교육 방향과 기초를 결정하는 시기로 자리 잡았다.

    해방된 조국에서 무엇보다 시급했던 문제는 일제 치하에서 왜곡되고 유린되어 온 교육체제를 바로 잡고 민족교육을 부활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교육체제를 관장하던 학무국(지금의 교육부) 초대 국장이 민족교육과는 거리가 먼 미군 대위에 의해 시작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지금도 그리 많지는 않다. 더욱이 교육체제를 바로 세우기 위해 구성된 +인사 대부분이 점령군인 미군측의 젊은 장교와 일본인 관료, 친일 +한국인으로 시작됐다면 이보다 더 큰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을까?

    일장기가 일본 총독부에서 마지막으로 내려진 것은 9월 9일 오후 4시 30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감격의 순간일 수도 없었다. 일장기가 내려지면서 그 +자리에 자랑스럽게 올라간 것은 태극기가 아니라 바로 성조기였기 때문이다.

    이날 아침 일본 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로부터 정식으로 항복문서를받은 하지 사령관은 곧 이어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藤柳作) 이하 +일본인 국장들에게 미군정의 행정고문으로 계속 남아 줄 것을 부탁했다. 해방 초기 미 군정청은 한국인들 스스로 자치활동이나 교육 활동을 펴나갈 능력이 부족하다는 시각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시각은 하지가 당시 기자단에게 한국 정세에 대해 언급한 말 가운데에서도 진하게 베어 나온다.

    "한국인들은 즉시 독립을 요구하는 것 이외에 이것을 달성하는 아무런 +방법도 가지지 않았고, 실로 나에게 필요한 지식을 주는 사람은 일본인뿐이다".

    하지는 9월 10일 미 육군 제7보병단장 출신의 아놀드 소장(A. B. Arnold)을 초대 군정장관에 임명하고 그를 중심으로 행정기구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9월 11일부터 9월 17일까지 총독부 8개국 국장을 모두 +전문성과는 거리가 있는 미군으로 임명했다. 특히 총독부의 기구 및 인원을 이용한다는 방침에 따라 일제 시대 총독부 관료 조직을 그대로 부활시켰으며, 일본인 관리들이 자문을 맡도록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교육체제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일본인 또는 친일 한국인 관리들을 등용하고 그들의 신분을 보호하는 정책을 펴 일제 잔재 청산과 민족교육을 열망하는 국민들의 정서와는 거리가 있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한국 L40 교육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때 아놀드에 의해 11일 교육담당관으로 임명된 미 육군 대위 락카드(E. L. Lockard)는 곧 이어 미군정청 학무국의 초대 국장이 됐지만 교육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부족했고 한국실정에는 더욱 캄캄했다. 때문에 그는 총독부 마지막 학무국장이던 한국인 엄상섭(嚴祥燮)에게 모든 자문을 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그런데 엄상섭으로 말하면 일제가 내선일체의 실제적 증거를 보여주려고 +처음으로 그런 고위직에 한국인을 앉힌 대표적 인물로, 전주사범을 나와 +잠시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하다가 사법고시 합격 후 검사직에도 있었던 거물 친일파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락카드 대위는 처음부터 총독부 동쪽의 방 하나에 공보담당 +사관들과 함께 섞여서 매일 엄상섭을 만나 배우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러다가 엄상섭은 오천석(吳天錫), 유억겸(兪億兼) 등을 소개해주고 뒤로 물러났다. 락카드는 기본 정책 방향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초기의 거의 모든 실무를 이들에게 맡겼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오천석은 영어에 능통한 미국통 교육자였으니까.

    이때 처음으로 오천석의 제의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9월 16일 구성된 한국교육위원회다. 그런데 우리나라 문교 행정의 효시가 됐으며 이후 교육체제 개편에 막강한권력을 행사한 한국교육위원회는 과연 어떤 인사들이 모여 어떤 일들을 +처리해 나갔을까?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