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야기] 학문을 위한 양심의 수난
(한겨레21 1997, 10, 9)

성대입시부정에 대한 석명준비명령 입시출제오류 감싸는 법원


"기게스의 반지"가 교수를 살해하고 있다

희랍신화에 리디아의 왕 기게스는 원래 양치기였으나 어느 날 우연히 반지 하나를 얻어 신통력으로 왕좌에 오른 인물이다. 그 반지는 요술을 부 렸다. 위에 달린 보석을 돌리면 반지를 낀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기게스는 그 반지로 왕비를 유혹하고 그와 공모하여 왕을 살해하고그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기게스의 반지는 소유자에게 양심과 정의의 의무를 면제해 준다. 그런 반지의 위력이 통하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이다. 기게스의 반지와 같은 신통력을 가진 부당한 제도 아래에서 의인은 식 물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누구든 금력과 권력으로 기게스의 반지를 얻으면 그만이다.

우리 사회에서 기게스 반지의 위험한 신비는 도처에서 일어난다. 75년에 제정된 군사독재의 유산으로 지금껏 위력을 발휘하는 사립학교법의 "교수 재임용제"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이 제도는 객관성과 합리성이 떨어져 학교쪽과 불편한 관계에 있는 "눈엣가시"인 교수를 내쫓는 기게스의 반지 노릇을 한다. 이 기게스의 반지에 한번 말려들면 빠져나올 방도가 없다. 탈락교수의 재심청구마저 처음부터 막혀있는 것이다. 최근 교육부가 이 제도를 근본적으로 수술하겠다고 밝힌 것은 문제의 심각성을 받아들인결과다. ( 입시출제오류 눈감은 교육부)

양심을 독살하는 기게스의 반지

교수재임용제에 희생된 교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교수는 대학교육의 당당한 주체이다. 그럼에도 사립대학에서 교수는 재단의 일방적 결정에 복종하지 않으면 쫓겨날 것을 각오해야 하는 실정이다. 대부분의 재임용에 탈락하는 교수들은 악덕 사립학교의 전횡에 맞선 대가였다는게 일반적인 평가다. 심지어 학문적인 양심을 선택한 결과로 재임용에 탈락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재임용제도가 이런 식으로 작용하는 가운 데 효용성을 인정하기 어려운 일이다.

최근 우리나라의 교수재임용제도는 국제적인 저널에까지 관심사로 떠올랐다. 수학저널인 <매스 인텔리전서> (Mathematical Intelligencer)와 과학 저널인 <사이언스>(Science)에 전 성균관대 수학과 조교수 김명호(41)씨 에 관한 기사에서 학문적 사망선고의 부당성을 밝혀 주목을 끌고 있는 것이다.

95학년도 성균관대 본고사 수학문항 채점과정에서 문제의 오류(관 련기사 <한겨레21> 제92호)를 지적했던 김씨는 부교수 승진에서 밀려난 뒤 재임용에도 탈락해 현재 미국에 체류하며 산타클로즈 캘리포니아주립 대학에서 무보수 연구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또한 이 문제와 관련해 김씨가 학교를 상대로 낸 "부교수 지위확인 청구소송" 항고심 선고공판 (97. 5. 27, 서울고법 민사11부, 부장판사 梁承泰, 양승태)에서 법원은 "학교쪽이 임용을 거부한 것은 교칙에 따라 이루어졌 다"는 학교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김씨의 패소판결을 내린 상태다.

재임용 여부는 임용권자의 판단에 따른 재량행위에 속한다는 대법원 판례 에 따른 것이다.(참조: 대법원의 원죄)
법원은 이 과정에서 교수 승진을 둘러싼 학교당국의 행위를 규제 할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수학문제의 오류, 논문심사의 부당성 등에 대해 눈을 감았다. 현재 김씨 사건은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대학당국은 김씨 사건에 대해 "입학시험 채점시 배타적인 태도로 혼란을야기하는 해교행위를 저지르고 학사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등 교육자로서 자질에 의혹이 있어 교칙에 정한 절차에 따라 재임용심사가 이루어졌다"며 재임용탈락이 적법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만큼 법원의 최종판결에 따르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런 구실이 재임용제도의 허점을 이용해 학문적 비도덕성을 감추려는 행위라면 사회적인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매스 인텔리전서"는 국제적인 수학자들의 연명으로 쓴 "정직의 대가(?) 라는 제목의 편집자 편지에서 "불행하게도 수학적 오류에 책임이있는 고참 교수진들이 (주: 이우영, 채영도 교수, 연구실적 심사 참조)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김 교수와의 싸움을 선택한 결과 김 교수는 승진기회를 박탈당하고 교수재임용이라는 그물에 걸려있다"는 표현으로 학교측의 결정을 비판했다. 이 잡지는 또 "수학자들은 실수를 할 수 있다. 실수가 발견되었을 때는 겸허한 마음으로 최대한 빨리 사고하고 그 실수를 고쳐가야 하는 것이다. 실수를 지적한 동료에 대한 프로다운 반응은 처벌 따위가 아니라 고마움이어야 했다"고 꼬집었다. <사이언스> 역시 랜덤 샘플란에 실린 기사에서 김씨 사건이 "정답에 대한 엄청난 대가"라며 대학당국과 법원의 양식있는 결정을 촉구했다.

학문적 양심에 따라 순조롭게 풀려야 할 사건이 국제적인 망신살을 뻗친 데는 우리 학계의 비도덕적인 풍토도 한몫 했다. 재판과정에서 법원은 사건의 발단이 된 입시문제의 "수학적 오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대한 수학회(주:당시, 회장 주진구 교수)와 고등과학원(주: 원장대리 명효철 수학교수 ) 등에 수학문제의 검토를 요구했지만 두 단체는 "한 대학의 교수임용과 관련된 문제로 검토해야 할 강제성이 없다 "는 내용의 회신을 보냈을 뿐이다. 미국 수학회 전 회장 로널드 그레이 엄 박사, 영국왕실학회 마이클 아티야경, 예일대의 서지 랭 교수 등 세계적인 수학자와 재미과학자협회 등의 "수학적 검토 요구"에 대해서도 같은 답변을 되풀이했다. (주: 주진구, 명효철교수는 서울대 수학과 동기)

이런 학술단체의 미온적 태도에 대해 서울대 자연대 수학과 계승혁 교수 등 전국 44개 대학 1백89명의 수학과 교수들이 불만을 표시하고 김씨의 정당성을 내세우며 서명 날인해 서울지방법원에 제출하기도 했다. 대한수학회 현 회장인 연세대 수학과 장건수 교수는 당시의 결정에 대해서는 답변할 처지가 아님을 전제하며 "입학시험 문제가 재임용의 걸림돌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법원에서 다시 의견을 요구하면 의논할 의향이 있다" (주: 장 교수는 아티야 편지에 답변 거부) 고 전향적인 자세를 밝혔지만 잃어버린 학문적 양심을 회복할 수 있을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학술단체도 진실 외면. 진실은 죽는가

한국과학기술원 정보통신공학과 조장희 초빙석좌교수는 김씨 재임용탈락 사건에 대해 "우리 사회의 도덕성의 상실과 부패, 학연과 지연이 판치는이기주의가 순수해야 할 학문세계에까지 오염된 결과"라며 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고 바로잡는 것은 우리 학계에 정의와 도덕이 아직도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일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한 김씨가 부교수 승진에 탈락한직접적인 이유가 된 학문적 평가를 객관적인 외부 교수들로 구성된 심사 위원회에 맡길 것을 제안했다. 수학시험 문제의 출제위원으로 참여한 교수가 논문심사 위원으로 선정되어 공정한 심사가 애당초 불가능했기 때문 이다. 김씨는 부교수 승진 탈락에 이어 정직 3개월의 중징계를 받았지만 교육부재심위원회에서 일종의 경고인 견책으로 징계를 낮춘 것은 학교당국이 얼마나 감정적으로 대응했는지를 보여준다.

대학에서 교수사회를 지배하는 기게스의 반지가 존재하는 가운데 창조적인 연구와 비판적 지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더구나 학문의 양심에 따른 정직한 고백이 해교행위로 매도되는 게 우리의 학문적 풍토라면 대학의 미래를 기약하기에 역부족이다. 교수의 연구실적을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없는 것도 대학당국의 "미운털 솎아내기"를 방조하고 있다.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맘껏 누리는 교수가 기게스의반지를 믿고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든 정당하지 못하다. 상아탑을 뒤흔드는 기게스의 반지, 그것에 살해당한 교수를 부활시켰을 때 학문의 양심은 비로소 회복될 것이다.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