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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치주의가 아니라 법을 위반한 판사들에게 도전했다”
인터뷰_ 최근 출소한 ‘석궁’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
2011년 04월 05일 (화) 16:18:15 권형진 기자 [email protected]

4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석궁 사건’의 주인공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54세)가 지난 1월 24일 출소했다. 1988년 미국 미시건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91년 성균관대 수학과 조교수로 임명될 때까지만 해도 그의 삶은 순탄해 보였다. 하지만 95년 1월 대학별 고사 수학문제 채점위원으로서 출제오류를 지적하면서 그의 인생은 180도 바뀌었다. 부교수 승진에 실패하고, 조교수 재임용에서도 탈락하면서 학교를 떠나야 했다. 2005년 이른바 ‘석궁 사건’(그는 ‘석궁 시위’라 부른다)이 터지면서 그는 결국 범죄자가 되고 말았다.

김 교수 사건은 그러나 ‘현재진행형’이다. 김 교수는 여전히 석궁 사건이 조작됐다고 지적한다. 석궁을 들고 갔지만 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혈흔 검증’을 위한 행정소송이 대법원에 올라가 있다. 단지 사법적 판단을 둘러싼 논란만 진행형인 것은 아니다. 학자로서의 책임의식과 자신이 속한 조직의 이익이 충돌할 때 학자적 선택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김 교수 사건은 여전히 묻고 있다.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교육자로서의 자질을 문제 삼아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시키고, 법원 또한 이를 받아들이는 일이 지금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담당 판사 역시 ‘재임용 거부 결정이 원고의 입시문제 출제오류 지적에 대한 보복이라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어도 간접증거들에 의해 상당한 개연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술회했는데, 그 많던 교수들은 그때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날, 2007년 1월 15일, 석궁을 들고 교수 지위 확인 소송 항소심 담당 판사였던 박홍우 부장판사를 찾아간 것은 김 교수였지만 석궁을 맞은 사람 역시 김 교수였는지도 모른다. 출소 후 지난 4년 동안의 기록을 인터넷(seokgung.org)에 정리하고 있는 김 교수를 지난달 31일 만났다.

   
   

△ ‘석궁사건’이 조작이라고 했는데, 법원이 그렇게 할 이유가 있나.

대법원이 저지른 죄악을 정확하게 지적한 탓이다. 핵심은 이거다. 77년에 대법원은 (77다300에서) '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교수 재임용은 예정되어 진다'고 ([사립학교법] 제 53조의 2의) 법률 해석을 했다. 그런데 87년 법률 해석을 변경하면서 재임용 여부는 학교 재량이라고 해 버렸다. 이 결정은 [법원조직법] 위반이다. 법률 해석을 변경할 때에는 대법원 전원합의체를 거치게 돼 있는데 지키지 않았다. 대법원 홈페이지나 판례집에서도 재임용에 관한 77년 법률 해석을 변경한다는 판결을 찾아볼 수 없다. 대법원은 77년 판결은 손해배상에 대한 사건이고 87년은 재임용 그 자체에 대한 판단이라 법 해석이 다를 수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같은 법조문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87년 판결 이후 20여 년 동안 400명의 양심 있는 교수가 이 법률 해석에 의해 생매장됐다. 그러면서 대학의 자정능력이 다 없어져 버렸다. 이런 내용을 지적한 『대법원의 재임용법 해석의 문제점』이란 자료집을 만들어 언론사 등에 뿌렸다. 이런 것을 포함해 대법원이 법을 어기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지적하니까 결국 징역 4년을 선고받은 거다.”

△ 결국 괘씸죄라는 말인가.

“괘씸죄라는 말은 사용하면 안 된다. 아무리 괘씸해도 법에 의해 처벌할 수 없으면 처벌할 수 없는 그게 법치주의다. 그걸 대법원이 망치고 있다. 물론 대법원 앞에서 1인 시위 하며 자존심 상하게 한 것은 있다. 박홍우 판사도 첫 만남부터 나한테 깨지면서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재판에서 처음 만났을 때 청구 취지를 갖고 한 마디 하더라. 두 가지를 냈었다. 교수 지위를 확인해 달라는 것과 재임용 거부처분을 취소해 달라는 것. ‘두 가지가 같은 건데, 하나가 되면 나머지 하나는 따라오는 건데 왜 두 개를 냈느냐, 하나로 하라’고 하더라. 박 판사 말이 맞다. 그런데 문제는, 대법원에서 그걸 두 개로 갈라놓았다는 것이다. 2006년 양승태는 소부 판결에서 재임용 거부 취소와 교수 지위 확인은 다르다고 판결했다. 이 얼마나 엉터리냐. 그래서 ‘하나가 되면 나머지 하나는 자동으로 해 주겠느냐’고 했더니 (박홍우가)그렇게 하겠다고 해서 청구 취지를 교수 지위 확인 하나로 했다. 박홍우가 뒤늦게 양승태 대법관의 판결을 알고 나서 세 번째 변론에서 청구 취지를 다시 두 개로 나누면서 실랑이가 있었다.”(거짓말의 달인 박홍우의 개소리 ☞ 2006년 5월 28일 세 번째 변론)

사실조회조차 거부 … “학자 자격 없는 교수 많다”

△ 사법시스템과 맞서는 데 학계의 도움은 없었나.

“실질적 도움은 별로 안 됐다. 1995년 1월 대학별 고사 수학문제 오류를 지적한 뒤 부교수 승진에서 탈락하고 ‘부교수 지위 확인 소송’을 냈을 때 수학 교수 189명이 나를 지지하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그때 전국의 수학 교수가 1천명은 넘었을 텐데 서명을 안 한 교수는 뭐냐. 당시 재판부가 대한수학회와(회장: 충남대 주진구 교수) 한국고등과학원에(과기대 명효철 교수) 입시문제 출제가 틀린 것인지 사실조회를 보내니까 '답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석궁 재판’ 때도 물리학회에(회장: 서울대 김정구 교수) 의견을 물었지만 '답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학자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이건 정치적 문제가 아니다. 학자로서 판단하는 거다. 학자로서 연구한 바탕을 갖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사니 뭐니 (대법원)눈치 보는 게 어디 있나?”

△ ‘석궁 사건’도 결국 수학문제 오류를 지적하고, 재임용에서 탈락한 것에서 비롯됐다.

“사실은 거기서 출발했다기보다…. 입시 문제는 아주 작은 것이다. 실수할 수 있고 지적할 수 있다. 능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인정하면 끝이다. 그 사실을 갖고 비난할 수 없다. 오류를 지적하며 비난한다면 내가 가서 옹호해 줄 것이다. 성균관대에서 쫓겨난 것은, 실질적으로 내가 있음으로 해서 다른 수학과 교수들이 피곤했기 때문이다. 그게 근본적인 문제다. 교수사회의 뿌리를 흔든 거다. 95년 당시 서울대 수학과 교수가 27명 있었는데 9 명(강정혁, 계승혁, 김창호, 김홍종, 신동우, 이인석, 조영현, 지동표, 최서영) 밖에 서명을 안 했다. 정치적으로 보면 성균관대가 아니라 서울대가 쫓아낸 것이다. 만약 서울대에서 반대했다면 성균관대에서도 못 쫓아낸다.”

△ 법원에서는 재임용 탈락의 위법ㆍ부당의 초점을 ‘교육자로서의 자질’에 둔 것 같다.

“정치 이야기를 하면서 욕설을 한 것은 맞다. 그건 경고라든지 충고를 들을 사안이지 징계사유가 된다는 것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다. 법원에서 문제 삼은 교육은 가정교육, 인성교육을 말하는 거다. 대학은 전문지식을 가르치는 것이지 가정교육을 하는 곳이 아니다. 이건 가정인데, 설사 교육자적 자질이 문제가 됐다고 해도 법리적으로는 그건 이미 교육부 교원징계재심위원회에서 결정이 난 문제다. 당시 법에 의해 교육부 소청심사 결과가 기속력을 갖는다고 대법원 판례에 나와 있었다. 새로운 증거가 나온 것도 아닌데, 2006년 교육부에서 교육자로서의 자질에 대하여 내린 '증거 불충분'하다는 결정으로 이미 끝난 것이었다. ‘교육자적 자질’ 부분은 법원 스스로 일사부재리 원칙을 어긴 것이다. 그런데도 법대 교수 중에 이런 사실을 지적한 사람이 없었다. 또 한 가지 핵심은, 부교수 승진은 연구업적만 갖고 하게 되어 있다. 부교수 승진심사에는 교육자적 자질에 대한 평가항목은 전혀 없었다.”

   
   
△ 당시 재판에 참여했던 이정렬 판사가 법원 게시판에 ‘교수로서의, 그리고 학교 조직의 구성원으로서의 다른 중요한 가치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결과적으로 스스로를 범죄혐의자로 만들어 버린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라고 말했는데.

“조직을 망하게 하려고 한 게 아니다. 조직을 더 좋게 하려고 한 거지. 단지 다른 사람들 식으로 하면 조직이 더 망할 것 같아서 그렇게 한 것이다. 조직을 뒤집을 생각은 없었다. 그냥 시험문제 틀린 것에 대해 폐기하는 쪽으로 해야 한다고 했더니 ‘수학과에서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나왔다. 그럼 최소한 책임자는 알아야 한다 생각해서 총장에게 보고한 것이다. 몇몇 친구들한테 상의한다고 물어본 거지 동네방네 떠든 게 아니다. 그런데 다른 교수들이 트집을 잡은 거다. 수학과 동료교수가 입시문제 출제 오류 지적 때문에 나를 징계했다고 실토한 기록을 갖고 있다. 보직교수들이 나를 수학과에서 내쫓으려고 야간 대학원으로 옮기라고까지 했다. 이건 다른 얘기지만, 응용 수학이 학생들 취업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수치해석 분야 교수를 뽑자고 했더니 다른 교수들은 통계학 교수가 은퇴했으니 통계학 전공자를 뽑자고 해서 싸움이 난 일도 있었다. 서울캠퍼스에 통계학과가 있는데도 말이다.”

△ 지금 다시 그런 상황이 생긴다면 어떻게 하겠나.

“당연히 지적했을 것이다. 다만, 그때와는 다르게 대처했을 것이다. 그때는 참 겁도 나고, 하나도 모르기도 하고. 너무 어리석게 대처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분하기도 하다. 지금처럼 다 공개하는 식으로 대처했더라면 상황이 더 나아졌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학자 … 학문적으론 더 깨우쳤다”

△ 어떤 교수였는지 궁금해진다.

“강의실에 있을 때만 교수지 밖에 나가면 인생선배라 생각했다. 나는 담배 안 펴도 내 앞에서 담배 다 피게 했다. 술 마실 때도 첫잔만 따르고 그 다음부터는 알아서 먹자고 했다. 축구동아리에도 매주 끼어서 뒤풀이에도 항상 참석했다. 학생들 하숙방에서 같이 자면서 조언도 많이 해줬다. 수업 끝나고 찾아와 질문했는데 금방 답이 안 떠오르면 나중에 도서관에까지 찾아가 이야기해 주고 그랬다. 그러다보니 학생들과 스스럼없이 대화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됐다. 우리나라 교수들, 미국 유학 가서 껍데기밖에 안 배웠다. 실제로 교수와 학생 간에 대화하는 게 중요하다. 학문적인 것뿐 아니라. 그게 바로 인성교육 아니겠느냐. 대신 학점은 달랐다. 인간적인 것 말고 실력을 보여라는 주의였다. 아무리 같이 술 마시고 아부해도 나한테는 안 통했다. 그러니 나를 싫어한 학생도 있었을 것이다.”

△ 학자 김명호와 석궁 사건 이후의 김명호는 어떻게 바뀌었나.

“옛날보다 더 성숙하고 나아졌다. 학문적으로 훨씬 깨우침이 많았다. 학교에서 쫓겨나지 않았으면 못 깨우쳤을 것들을 많이 깨우쳤다. 학교에서 쫓겨나면서 내가 평생 가야 할 길, 무엇을 원하고 좋아하는지, 어디에 재능이 있는지 조금 찾은 것 같다. 교도소에 있으면서 조금 길이 보였다. 지금은 출소하고 나서 지난 4년 동안의 자료를 정리하느라 못 하고 있는데 마치면 해 보려 한다.”

△ 여전히 학자의 길인가.

“그렇다. 나는 학자다. 연구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학교 쫓겨나 외국에서 회사 두 군데를 다닐 때에도 계속 리서치 분야의 일을 한 거다. 학교 그만두고 초기에는 데이터 분석에 관심이 많았다. 요즘은 유전공학 분야를 조금 더 들여다보면 뭔가 보일 것 같다. 감옥에 있을 때에도 유전공학 분야 책을 좀 들여다봤다.”

△ 결과적으로 이번 일은 선생님께 어떤 의미였나.

“(대법원이 정의의 최후 보루? 무슨 얼어 죽을 최후의 보루?) 교수 지위 확인 소송을 통해, 대법원이 ‘공공의 적’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걸 알리기 위해 석궁을 들고 간 것이고, 또 석궁 재판이 그걸 증명했다. 석궁을 쏘지도 않았지만, 그 따위로 재판테러를 하면 너희들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법치주의에 도전한 게 아니라 법을 위반한 판사들에게 도전한 것이다.”

   
   

글ㆍ사진 권형진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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